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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내 눈이 멀어버린다면.

백지오 2024. 9. 5.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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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당장 대학병원 가야 돼. 조금 있으면 눈먼다.

내 인생에 이런 이야기를 들을 날이 올 줄은, 그것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2024년 3월, 만 23세의 봄날이었다.

봄바람도 좋고, 대학생활의 막바지도 즐길 겸 렌즈라도 맞춰볼까 해서 방문한 안과에서 선생님의 권유에 가벼운 마음으로 받은 검사였다.

매끈한 검사 장비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내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시는 선생님의 표정이 세상 진지하시기에, 장난스럽게 "안 좋은 거예요?"라고 물었는데, 정말 안 좋은 소식일 줄이야.

이름도 생소한, 망막 열공

필자의 전공은 컴퓨터 비전(Computer Vision)이라는 분야로, 쉽게 말해 컴퓨터가 세상을 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덕분에 카메라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물체에 반사된 빛이 어떻게 전자 신호로 변환되고 압축, 저장되며, 이를 인공지능이 어떻게 이해하는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야..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의 눈은 동공이라는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을 망막이라는 얇은 막에 맺히게 하고, 이를 시신경이 뇌에 전달하여 세상을 본다.

그런데 당연하게 제자리에 있어야 할 내 망막이, 여기저기 찢어져 위치에서 떨어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동공을 통과한 빛이 맺힐 곳이 없어지고, 시신경이 읽어올 것도 없어진다. 눈이 머는 것이다.

무서운 점은 망막에 구멍이 나고 일부가 떨어져 나가더라도 우리의 뇌가 인지하기에는 매우 작고 느린 변화이기에, 이를 인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망막에 난 구멍은 조용히 크기를 키워나가다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완전히 떨어져 나가 눈이 머는 망막 박리로 발전하게 된다.

나는 설명을 듣고 한참을 양눈을 번갈아 가려본 이후에야, 내 오른쪽 눈의 시야가 20% 정도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일, 내 눈이 멀어버린다면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

면접이나 사석에서, 인공지능 분야 중 컴퓨터 비전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할 때 가벼운 마음으로 인용하던 속담의 참뜻을 그제야 절실하게 깨달았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어제 읽다가 덮어둔 책을, 기대하고 있던 영화를 내일이면 못 보게 될 수도 있다.

당장 생활을 어떻게 할지, 프로그래밍은 계속할 수 있을지 따위는 너무 막연하고 두려워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안과를 나와 본 풍경은 분명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풍경이었으나, 내게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풍경이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비추는 평범한 아파트 단지 사진
안과를 나와 찍은 사진. 너무나 평범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치료 과정

망막 열공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망막 박리까지 진행된 이후 갑자기 눈이 안 보여 응급실을 찾게 된다.

그때는 떨어져 나간 망막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대수술을 통해서야 시력을 일부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다행히도 망막 열공 단계에서 검진을 통해 질병을 알게 된 나는 망막 박리까지 진행되기 전에 적절한 치료로 진행을 멈출 수 있었다.

망막에 손상이 있는 부분에 레이저를 쏴서 진행을 멈추는 시술이었는데 레이저가 어떻게 손상을 막아주는지 원리가 참 심플했다.

망막에 화상을 입혀서 세포 회복을 촉진하고, 결과적으로 망막이 제자리에 더 강하게 붙어있게 하는 거라나.

두려움에 떨며 눈을 기계에 가져다 대니, 눈에 십자 모양 조준용 레이저가 보였다. 영화에서 저격수한테 조준당하는 주인공의 기분이 이런 거였을까?

곧이어 선생님이 조준을 마치고 버튼을 누르자, 기계에 가져다 댄 오른쪽 눈으로 눈부신 광선이 들어가는 게 왼쪽 눈으로 보였다.

한두 방은 참을만했는데, 시술이 5분을 넘어가자 "억" "윽" 소리가 절로 나왔고, 40분 정도의 시술이 완료된 뒤에는 등이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내 치료를 맡으신 교수님은 굉장히 난이도 있는 케이스였는데 아주 잘 마무리됐다고 결과 사진을 손으로 짚어가며 뿌듯하게 설명해 주셨는데, 감격(?)의 눈물에 고개를 숙이고 연신 감사하다는 말밖에 드릴 수 없었다.

몇 주 후, 경과를 보기 위해 다시 안과를 찾았다.

오.. 진짜 예쁘게 잘 붙여놨네?

안과 선생님들끼리는 통하는 미적 기준이 있는 걸까?

망막 열공을 발견해 주신 선생님께선 치료의 퀄리티에 감탄하시면서, 치료가 잘 됐음을 알려주셨다.

몇 주간의 긴장이 그제야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상특) 상처 불로 지짐

다시 일상으로

치료를 통해 진행을 막아두긴 했지만, 여전히 내 눈에는 구멍이 나있고 오른쪽 눈은 왼쪽 눈보다 시야가 좁다.

눈에 충격이 가면 안 좋을 수 있다는 말에 즐겨하던 주짓수와 러닝도 못 하게 되었고, 눈이 가려워도 눈을 비빌 수 없어 인공눈물을 챙겨 다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발견한 병은 그야말로 내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내일 죽어도 후회 없이 살자는 생각은 해봤으나, 내일 눈이 멀면 어떻게 할지 고민은 안 해봤기에,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도 되었다.

나무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의 사진, 고양이의 입 부분이 저무는 태양에 맞닿아 있어 분위기가 아름답다.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치면 사진을 더 자주 찍어두게 되었고,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

기술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다.

이전의 내가 컴퓨터 비전을 한 이유가 기술을 진보시키는 것, AI가 세상을 더욱 고해상도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만드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길 바란다.

AI가 볼 수 있는 해상도가 2배 높아지는 것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눈앞에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것, 더 많은 사람이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언젠가 내 병이 다시 악화되어서, 혹은 상상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 앞을 보지 못하거나 귀가 먼다고 해도, 내가 단단하게 이겨나갈 수 있기를, 또 잃어버린 것을 소중히 하지 않았다고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따라서 지금은 아름다운 하늘과 사계절,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과 좋아하는 책, 정돈된 책상의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내가 눈과 귀, 코, 입, 몸과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각과 행복을 마음껏 즐기며,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힘껏 발휘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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