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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가득 유후인 여행 [공돌이의 나홀로 일본여행 1편]

백지오 2023. 9. 3.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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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나 홀로 여행을 시작하며...

올해 3월, 생애 첫 혼자 여행을 다녀온 후로 나는 그야말로 나 홀로 여행 예찬론자가 되었다.

연구실 동료들, 가족들, 친구들... 만나는 사람마다 혼자 여행을 꼭 가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권하고 다녔으며 삶이 힘들 때는 혼자 방문했던 제주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며 다음 여행을 꿈꾸었다.

내 첫 나홀로 여행 이야기는 이전 여행기에서 다루었으니 생략하겠지만 요컨대 나는 혼자 여행하며 오로지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로 발생하는 모험을 겪으며 나를 둘러싼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였고, 이 경험은 과장을 좀 보태자면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기에, 이러한 경이로운 체험을 나만의 것으로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워 다른 이에게 권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예컨데 가족들 앞에서 나는 예의 바르고 가족들을 배려하는 장남 백지오이고, 친구들 앞에서는 거침없고 추진력 있는 친구 백지오이며, 연구실에서는 뚝딱거리면서도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백지오 연구원이다.

올해 초, 21개월간 가지고 있던 군인 백지오의 페르소나를 보내고 민간인 백지오와 백지오 연구원의 페르소나를 얻은 나는 약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바쁘게 연구실과 집, 친구들과의 약속을 오가며 어떨 때는 겸손하고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가, 어떤 때는 확확 튀고 말 많은 사람이 되었다. 뭐가 되었던 지난 2년간 익숙했던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때때로 말을 줄여야 할 곳에서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말을 해야 할 곳에서 말을 못 하는 실수를 하기도 하였다. 겸손한 나와 자신감 넘치는 나, 조용한 나와 말 많은 나... 도대체 내 원래 성격이 뭐였는지 혼란스럽던 중 혼자 찾은 제주도에서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조용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제주도의 시골길에서 새로운 나를 찾은 것처럼, 이번 여행에서도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약간의 걱정과 큰 기대를 안고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인천에서 후쿠오카까지의 짧은 비행을 마치고 거의 비행시간 만큼이나 길었던 입국심사줄을 지나자 마침내 기대했던 일본의 풍경이 펼쳐졌다. 일본어로 된 안내 표기들과 작게 병기된 한글이 이곳이 일본임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묘하게 우리나라와 비슷한 공항 풍경과 사방에서 들리는 한국어에 아직은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특이하게 생긴 버스를 보니 조금 일본 느낌이 났다.

나는 공항에서 나와 곧장 예약한 고속버스를 타고 유후인으로 이동했다. 일본에 온 김에 온천도 제대로 즐겨봐야겠단 생각에 유후인에서 2일간 보내는 일정을 짰는데, 덕분에 아침부터 5시간 이상을 이동에 소모한 것 같다. 그래도 마침 전날 밤 공항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피곤했던 터라 오히려 좋다 생각하고 열심히 잤다.

고풍스런 느낌의 유후인 역

푹 자고 일어나보니 어느새 유후인.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같이 탄 한국인 관광객들의 한국어에 또다시 여기가 한국인가 일본인가 싶었지만... 조금 걸어 유후인 역으로 나가니 바로 일본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바다 인근이라 그런지 풍성하고 이쁘게 생긴 구름들과 고풍스럽고 약간 이국적인 역사, 이제 좀 들리기 시작하는 일본어...

진짜 내가 일본에 왔구나.

잠이 덜 깨서 안색이 영 좋지 않은 모습이다.

남대생 국룰 포즈로 셀카 한번 찍어주고, 큰 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 거리 걸으면서 진짜 일본이다.. 싶었다.

유후인에 오기로 했지만 버스와 숙소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조사하지 않고 왔다. 이제 그야말로 모험 시작인 것이다. 대충 둘러보니, 유후인 역에서 사진에 보이는 멋들어진 산을 향해 큰길을 따라 번화가가 있는 동네인 것 같았다.

번화가에는 뭔가 관광객을 타겟으로 한 것이 명백해 보이는 식당들이 많았는데, 최대한 가정식스러운 음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싶어서 마음에 드는 가게가 나올 때까지 걸었다.

10분쯤 걷다보니 하얀색 목재 인테리어에 식물로 포인트를 준 건강식 컨셉의 식당울 찾았다. 내 유일한 짐이자 친구인 가방을 건너편 자리에 앉혀주고, 가라아게 정식을 주문했다.

가라아게 정식

샐러드에 가라아게, 밥, 피클 비슷한 무언가에 나물... 성공이다. 완전 취향저격이다.
일본에서 먹은 음식은 대체로 한국에서 먹는 일식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른 맛이라, 편안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의 식사였다.

성공적인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따라 걷다가 미술관을 발견했다. 건물도 멋지고 예사롭지 않아서 검색해 보니 쿠마 겐고라는 건축가가 지은 건물에 소장품도 쿠사마 야요이, 무라카미 타카시 같은 거물 작가들이었다. 이걸 어떻게 참지? 바로 들어갔다.

사실 바로 들어가진 않고 사진 하나 찍었다. 코미코 아트 뮤지엄

최근 들어 미술에 꽂혀서 일본에서도 미술관 좀 가야지 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렇게 좋은 미술관을 찾을 줄은 몰랐다.
대학생 할인으로 1200엔에 입장권을 구입하고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뮤지엄을 구경했다.

쿠사마 야요이나 무라카미 타카시의 작품 모두 우리나라에서 몇 번 보았지만, 이곳에는 아예 10여 점 이상씩 작품이 설치되어 있고, 이 작품들에 맞춰 설계된 건물과 작가에 대한 해설을 들으며 작품을 볼 수 있어 완전히 색다른 기분이었다.

유후인에는 온천이나 즐기러 왔는데 그저 걷다가 내가 좋아하는 건축, 현대 미술을 같이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을 만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이 맛에 무계획 여행 한다니까.

처음 방문한 미술관부터 너무 좋아서 여기 얘기를 더 하자면 독자 여러분들이 도망갈 것 같으니 접은 글로 숨겨두겠다. 관심있으신 분들만 보시기 바란다.

더보기

미술관에 대해서 TMI 좀 하자면... 건물은 2개의 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게 심상치 않다.

전체적으로 일본 스타일의 외관인데 외장재는 새까만 나무로 되어있다. 뭔가 하니 그을린 삼나무라고 한다.

디자인만 봐도 이거 미술관이구나. 싶다.

갤러리 내부는 미술관 답게 과하지 않은 절제된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갤러리 사이를 물이 흐르는 수반이 가로막고 있어 이동하려면 건물을 빙 돌아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 길이 또 예쁘다. 우측으로는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고, 좌측은 멋들어진 건물이 있다.

내부에 있는 작품들은 또 어떤가. 쿠사마 야요이와 무라카미 타카시 외에도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잔뜩, 해설과 함께 준비되어 있으며 하나하나 굉장히 괜찮은 작품들이었다.

2층에는 그림이 아닌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유후다케를 배경으로 전시된 작품들이 또 멋들어진다.

미술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미술관 갈 겸 유후인 가도 좋을 것 같다.

진짜 끝내준다.

멋진 노부부께서 운영하시는 "카라반 커피 유후인"

미술관을 둘러보고 여운에도 잠기고 좀 쉴 겸 미리 찾아둔 카페를 찾았다. 관광지에서는 좀 거리가 있지만, 이 지역에서 무려 50년 간 커피를 만들어 오신 노부부께서 운영하는 "카라반 커피 유후인"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 이외에 핸드드립 커피 등이 많이 주목받고 있지만, 일본은 이미 50년 이상 전부터 핸드드립과 사이폰 커피 등을 취급하는 카페가 많이 발달해 있었다. 때문에 숙소 이외에는 사전 조사를 최소화하기로 한 이번 여행에서, 카페만큼은 인터넷과 모든 정보를 총 동원해서 잘 골라 다니면서 일본의 커피 문화를 조금 배워보고자 하였다.

기대를 안고 방문한 첫 카페,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에 클래식 음악, 멋진 신사복을 차려입으신 할아버지 바리스타를 보니 가슴이 뛰었다.

메뉴를 받아보니 대략 10 종류의 원두를 취급하시는데 하나하나가 한국에서는 잘 보기 힘든 원두였다. 오랜 고민 끝에 인도네시아 토라자를 주문했다. 할아버지께서 능숙하게 커피를 갈아 사이폰에 넣고 추출을 시작했다.

사이폰은 구조가 복잡하고 부품이 많아서 설거지나 관리도 힘들고 추출 기구 자체가 매우 뜨겁게 가열되는 번거로운 방식이라 취급하는 가게가 많지 않은데, 50년이나 사이폰 커피를 고집하고 계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에서의 첫 커피는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즐거운 맛이었다.

커피 마시고 안색이 좋아진 모습이다.

커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걸어서 이번에는 유후인의 명물(?) 킨린 호수를 찾았다.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아서 호수를 따라 가볍게 산책을 하고, 셀카도 좀 찍어줬다.

여기서 찍은 사진을 엄마한테 카톡으로 보냈는데,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여기 온 적이 있다고 사진을 보내주셨다.

뭔가 신나보이는 친구가 나다.

세상에... 저 애기는 자기가 나중에 커서 여기를 혼자 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무튼 호수를 따라 계속 걷다가, 뭔가 특이한 건물을 발견해서 보니 온천이었다.
마을에서 관리하는 무인 온천인 시탄유 온천이란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시탄유 온천"

앞에 있는 통에 300엔을 넣고 들어가서 이용하면 된다는데, 정말 작고 남탕 여탕이 따로 없다. 이거 들어갔다가 뻘줌한 일 생기면 어떡하지? 애초에 물은 깨끗할라나? 온갖 걱정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데 이거 너무 궁금하다.

인터넷을 조금 찾아봤다.

용기 내어 이용하는 사람이 잘 없어서 들어간 사람들은 다 전세 낸 것처럼 썼다는 후기밖에 없다. 하... 못 참겠다.

문 열고 코너 한번 돌면 보이는 풍경

심호흡 한 번 하고, 3백엔 넣고, 이용 매너 꼼꼼히 읽어보고, 들어갔다.
와 진짜 아무도 없다. 그런데 온천 끝내준다. 너무 신난다.

이게 2천 7백원짜리 뷰다.

과연 리뷰대로 40분을 온천에 있는데 들어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
완전 부자가 된 기분으로, 세상 편하게 풍류를 즐겼다. 

피부로 느껴지는 따뜻한 온도,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눈앞의 멋진 산과 구름, 모든 감각이 비현실적으로 좋은 시간이었다.

나중에 숙소에서 만난 일본 아저씨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일본인도 이런 거 잘 이용 안 하는데 진짜 용감하고 재밌게 여행 다닌다고 감탄하시더라. 뿌듯했다. ㅋㅋ

길가다 만난 갤러리

온천을 나오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가오길래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를 향해 출발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유후다케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산 중턱에 위치한 숙소였는데, 올라가다 보니 웬 한국어가 보였다.

"유후인 정동주 갤러리"

편히 들어오시라고 쓰여있기에 들어가보니 유후인에 사시는 한국 작가 정동주 님의 갤러리였다. 갤러리에는 작가님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타국 땅에서 만난 한국인이 반갑기도 하고 작품들도 다 멋져서 정말 반가운 시간이었다.

유후인 시내보다 100m 높은 곳에 위치한 "컨트리로드 유스 호스텔"

이어서 30분쯤 언덕을 올랐을까, 마침내 숙소인 유후인 컨트리로드 유스 호스텔에 도착했다. 사실 저녁까지 먹고 올 생각이었는데 유후인은 관광지라 그런가 식당들이 문을 일찍 닫아서 체크인과 동시에 혹시 저녁을 지금 부탁드려도 될지 물었다.

사장님은 원래는 아침에 연락을 줘야만 준비해 줄 수 있지만, 일 인분 더 준비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 하시더니, 저녁을 주실 수 있다고 하셨다. 못 주신다고 하면 편의점까지 왕복 1시간 30분이었는데, 구사일생이었다.

아늑한 느낌의 유스 호스텔

방에 짐을 풀고 거실에 앉아 숙소를 구경했다. 창밖으로 유후인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위치에, 약간 미국 시골 풍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소품들이 예쁜 숙소였다. 다른 게스트들은 대체로 일본인들이 많은 것을 보니, 일본에서도 평가가 좋은 숙소인 것 같았다.

엄청 맛있었던 저녁

잠시 후, 기다리던 저녁이 나왔는데.. 이게 진짜 일본에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경양식 느낌이었는데, 가운데 함박 스테이크와 우측의 두부 샐러드도 건강하면서 맛있는 맛이고, 좌측의 가지 오일 파스타가 진짜 센세이션 한 맛이었다.

가지를 정말 싫어하는 내가 감탄하면서 먹을 맛이라니... 배우고 싶었는데 다음에 또 가게 되면 물어봐야겠다.

유후인의 야경

밥을 먹고 쉬고 있으니 사장님이 곧 나이트투어에 갈 거라며 같이 가자고 권했다. 사장님은 키가 크고 목소리가 쾌활한 멋진 형 같은 느낌의 아저씨였는데, 나이트 투어에서 역시 익살스럽고 재밌게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투어를 진행해 주셨다.

우리는 전봇대 하나 없는 산길을 올라가며 풀숲에 숨어있는 반딧불이와 하늘의 별들을 감상했다. 여름의 대삼각형, 북두칠성, 견우성과 직녀성... 별을 그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이었다.

투어의 마지막에는 유후인의 야경을 내려다봤는데,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잽싸게 사진 하나 찍어왔다. 감성 폭발하는 나이트 투어를 마치고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오니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다음에 꼭 다시 가야지.

숙소에 돌아와서는 같은 방을 쓰게 된 아다치 상과 수다를 떨었다.
아다치 상은 우리 아버지와 같은 64년생인데, 혼자 온천 여행을 하고 계시다고 했다.

나이 차이가 상당히 났지만, 여행지라는 특이한 상황 덕분일까? 여행 이야기와 온천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치 그가 친한 형처럼 느껴졌다.

낭만을 한가득 충전하고, 아쉬움과 다음날에 대한 기대를 안고 잠에 들었다.

어느새 첫 나 홀로 해외여행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은 사라지고, 즐거움과 기대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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