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 간다. 그 전에 제주에 들렀다. [공돌이의 나홀로 제주여행 1편]
오래전부터 혼자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럼에도 매번 여행을 가야지 하면 '이왕 가는 거 친구랑' '이왕 가는 거 가족이랑'하며, 좀처럼 혼자 여행을 미루어 왔는데, 대학원 진학이 확정되고 문득 지금 가야겠다는 충동이 든 것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틈틈이 '언젠간 가야지'하며 찾아놓은 숙소들과 식당들을 적당히 선으로 이어 간단한 계획을 세우고, 마침 얼마전에 만든 신용카드로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한 것이 지지난주 금요일이었다.
내가 다음주에 제주도에 간다니 몇 사람은 같이 가자고, 제주도에 사는 친구는 놀러 오라고 거절하기 힘든 제안들을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혼자만의 여행을 하겠노라 결심한 이상 모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여행을 떠나는 월요일, 아버지와 아쉽게 인사하고 집을 나서니 간밤에 설레었던 마음이 떠오르며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막상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에 타 주변을 둘러보니, 이내 걱정이 들기 시작하였다.
여의도나 노량진에서 내릴 것 같은 양복쟁이들은 혼자인 사람도 있고 동료와 함께인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누가 봐도 김포공항을 향하는, 한 손에는 캐리어를 들고 멋을 낸 사람들은 하나같이 짝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나는 항상 입는 후드티에 (역시 항상 매는) 아끼는 백팩을 메고, 마치 평소에 학교로 향하는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내 옆에도 누군가 설레는 표정으로 함께 있었더라면, 혹은 추울 수도 있지만 역시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코트를 입고 나왔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도 김포공항을 향하는 여행객으로 보였을까?
내 마음이 막 떠나온 집의 옷장 속에서 해매이고 있는 동안, 9호선 급행 지하철은 빠르게 달려 나를 김포공항에 내려주었다. 장거리 연애를 할 때 숱하게 찾아온 김포공항. 그때는 혼자 오든 누군가와 함께 오든 이곳이 참 반가웠는데.
일단 와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미리 만든 일정에 따라 움직여보기로 했다.
먼저 롯데백화점 지하에 있는 영풍문고에 찾아가, 책을 한 권 골랐다.
오늘 방문할 숙소는 밤마다 게스트끼리 독서모임을 진행하는 독특한 게스트하우스이다.
독서의 주제가 "사랑"인만큼, 전부터 '언젠가 읽어야지' 하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골랐다.
깔끔한 새 책을 구매하니, 마침내 여행을 함께할 친구를 얻은 듯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책을 들고 다시 역을 지나, 김포공항에 들어섰다.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눈앞에 펼쳐지는 바쁜 공항의 모습. 그 뒤로 보이는 런웨이와 바삐 움직이는 비행기들은 항상 나를 들뜨게 만드는 것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덕분에 비행기들을 구경하기 좋으면서도 햇볕이 따갑지 않은, 좋은 자리를 골라 앉았다.
공군에 있을 때는 물론 어렸을 적부터, 긴 활주로를 달려 무거운 비행기가 사뿐 날아오르는 모습은 마치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보고 또 봐도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마침내 편히 앉아, 아마 나보다 먼저 제주도로 떠나는 터일 비행기 한대가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 이런 걸 느끼고 싶어서 나온 거였지.
근심들을 먼저 간 비행기들에 실어 어딘가로 보내버리고, 나도 16시 05분에 출발하는 제주항공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내 여행은 공항에서,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오니 어느새 오후 5시 20분이 넘었다.
비행기값을 아끼려고 늦은 비행기를 선택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늦을 줄이야.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예약한 숙소까지는 1시간.
독서 모임이 잡혀있는 7시 30분까지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제주도에서는 버스 배차 시간이 길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대로면 저녁도 못 먹고 제주도에 오자마자 독서 모임에 끌려갈 판이다..!
나는 지도 앱을 켜고, 숙소 주변의 버스 정류장을 죄다 찍어보며 더 빨리 갈 방법이 없는지 몰색했다.
오, 숙소 근처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곧 출발한다.
나는 잽싸게 공항 정문으로 나가,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서 내리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사진 한 장 안 찍기에는 하늘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남기고 다시 뛰었다.
10여분을 뛰어 식당에 도착했다. 6시 50분.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버스에서 미리 봐둔 메뉴를 주문했다.
닭튀김 정식. 제주도에서의 첫 끼니로는 의외의 선택이지만, 치킨러버 백지오에겐 이거지.
게스트하우스에서 주변 맛집으로 추천하기에 찾아온 식당이다.
일본식 라멘 맛집이지만, 미안하지만 오기 전에 아침으로 짜파게티를 먹고 와버렸다.
역시 한 음식을 잘하는 집은 다른 음식도 잘한다.
이 메뉴, 맛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한 점 한 점 음미하며 먹고 싶은 맛이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달렸다.
음식 15분 컷.
이제 시간은 7시 23분. 숙소까지는 걸어서 15분. 달린다면?
숙소로 가는 길은 여느 시골길처럼, 매우 고요하고 어두웠다.
달리는 발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고, 하늘에는 전역한 이후로 못 봤던 만큼의 별들이 날 응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마침내 숙소에 도착.
시간은? 7시 28분.
인간 승리다.
난생처음 방문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입성하자 서점숙소 사장님께서 친절히 맞아주셨다.
사장님과 인사하고, 도미토리를 함께 사용할 룸메이트들에게 인사하고.. 마치 군대 같기도 하고 기숙사 같기도 하고...
혼자서 숙소를 잡아본 적도, 이렇게 불특정 다수와 사용하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본 적도 없었는데,
서점숙소는 낯설기보단 따스하고 정감 있는 분위기였다.
짐을 정리하고 <사랑의 기술>을 꺼내어 2층으로 향했다.
책장 빼곡히 꽂힌 책들 앞에 놓인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독서 모임 <오름에게>가 시작되었다.
삼성 반도체 직원, 현역 장교, 회사원, 나보다 나이가 많은 딸을 셋이나 두신 어머니... 그리고 대학원생(진) 나까지.
8명의 게스트와 서점숙소 사장님이 모여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모임은 각자 책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필사하고 낭독한 후,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도 <사랑의 기술>에서 봐 두었던 구절을 읊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저, 문예출판사
우리는 2시간 넘도록 이성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사람이 아닌 것에 대한 사랑에 대한 대화와 경험들을 나눴다. 사랑은 배경, 성별, 나이, MBTI를 초월하여 모두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게 한다.
주제 참 잘 골랐네.
각자 이야기를 하던 중, 한 분이 오늘 우도에 다녀왔더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사장님 말로는 지난 일주일간 날씨가 안 좋았는데, 지금이 여행하기 좋은, 제주도에서 흔치 않은 좋은 날씨라나.
난 내일 뭘 하려고 했더라?
메모장을 보았다.
2월 28일
카페 가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계획 세우기 (저축 계획, 운동 계획 등)
세상에. 일주일 전의 나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볼펜으로 내일 계획을 모두 직직 그어버렸다.
그래. 내일은 우도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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