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제주속으로 [공돌이의 나홀로 제주여행 2편]
제주 여행의 첫 아침이 밝았다.
알람을 맞추고 잘까 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것도 같고, 편안하게 눈 떠지는 시간에 일어나고 싶어서 그냥 잠자리에 들었는데, 편하게 눈이 떠질 때 일어나 시계를 보니 8시가 되어 있었다.
딱 적당한 시간.
2층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에 나와보니 사장님이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소시지를 굽는 냄새가 이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새삼 조식을 신청하지 않은 어제의 내가 조금 원망스러워지려 했다.
더 있다가는 금방 배가 고파질 것 같아서, 서둘러 세수를 하고 짐을 쌌다.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어제 대화를 나누었던 숙소 게스트분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날이 밝고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보니, 참 평화롭고 예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가는 길에 산책을 다녀오시는 게스트 분을 또 마주쳤다. 반가워라.
"오늘은 어디로 가실 거예요?"
"우도에 가보려고요!"
"어떻게 가시는데요?"
"걸어서요!"
나는 우스꽝스럽게 과장된 자세를 취해 주고 즐거운 여행 되시라고 인사를 건넸다.
큰 길가로 나오니 제주도스러운 돌담들과 건물들, 그리고 저 멀리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서울에서는 한동안 못 마셨던 맑은 공기와 바다 내음이 폐 깊숙이 들어왔다.
첫 목적지는 역시 식당이다.
적당히 걷다 보면 식당에 도착했을 때, 딱 음식을 먹기 좋은 공복이 되어있겠지.
어제 봐둔 식당이 두 곳 있었는데 하나는 제주 흑돼지를 쓰는 경양식 돈가스 집이고, 하나는 광어회무침 집이었다.
사실 회무침, 물회 같은 것들을 안 좋아해서 무조건 돈가스집에 가려고 했으나 조금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도전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따라 걸으며 바닷가를 보니 왜가리와 가마우지, 오리들이 와글와글 모여 사냥을 하고 있었다.
물고기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별안간 나도 뭔가 바다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좋아. 오늘은 도전해 보자고!
목적지를 김녕에 있는 회무침 집으로 정하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배가 고파지기 전에 가려면 서둘러야 해!
4km 정도 바닷길을 따라 걸어 마침내 식당을 발견했다.
시간은 어느새 10시. 일어나자마자 1시간을 걸어왔다.
다행히 식당은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사장님과 밝게 인사를 나누고, 회무침을 주문했다.
사장님은 내가 첫 손님이라며 푸짐한 회무침과 국, 반찬으로 구성된 한상을 내어주셨다.
깻잎과 고추장 냄새가 코를 스쳤다.
순간 냉장고 안에 있던 한라산 소주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소주는 좋아하지 않지만, 이건 무조건 소주랑 먹으면 맛있다.
나는 배고픔과 소주의 유혹을 뿌리치고 사이다를 주문했다.
그리고 마침내, 깻잎에 회무침을 듬뿍 올려 한입 싸 먹었다.
와. 이래서 회무침을 먹는구나.
어릴 적에는 그렇게 싫어하던 회무침이, 이렇게 행복을 주는 음식이었을 줄이야.
제대로 먹어보지도 않고 선입견을 가졌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야무진 식사를 마치고, 사장님께 정말 잘 먹었노라 감사를 드렸다.
회무침에 공깃밥까지 먹으니 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럼 이제, 간식을 먹으러 가볼까?
지도 앱을 켜고, 봐두었던 카페로 가는 길을 찾았다.
오, 바로 가는 버스가 있네. 배차간격 20분, 잠시 후 도착..?
나는 가득 찬 배와 배낭을 짊어지고 버스 정류장으로 달렸다.
군대 다녀와서 체력과 판단력이 참 좋아졌다.
내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저 멀리서 버스가 와서 내 앞에 멈췄다.
짜릿하다. 난 최고야.
버스를 타고 10여분, 거친 숨을 가다듬고 있으니 금방 카페 앞에 도착했다.
항상 빵집에 오면, 모든 메뉴가 다 먹고 싶어서 큰일이다.
그나마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만, 제주도 외곽에 있는 카페에 언제 또 와보겠는가.
일단 소금빵, 여행 왔으니 케이크도 하나 먹어주고... 스콘은 포장했다가 나중에 먹으면 되겠다.
야무지게 메뉴를 선택하고 예쁜 창가자리를 골라 앉았다.
제주도는 어느 위치든 대충 통창을 뚫어놓으면 그림이 된다. (이 빵집이 창을 대충 뚫어놓았다는 건 아니고..)
끝내주는 절경을 앞에 두고 커피와 빵. 이거면 충분하지.
소금빵은 상상 이상으로 맛있었다.
백지오 선정 최고의 소금빵집이 우리 동네에 있어서 행복했는데, 이제 너무 멀어져서 슬프다.
참지 못하고 감자빵을 하나 더 포장했다.
어차피 오늘 많이 걸을 거니까~
걷고 또 걷고...
이제 정말 배가 가득 차 버렸다.
다음 목적지까지는 무조건 걸어야지.
다음 목적지는 바로 종달항.
우도로 가는 배가 있는 곳이다.
빵집에서부터 걸어서 1시간 30분? 쉽구먼.
나는 배낭을 메고, 입고 온 패딩을 마치 복면처럼 얼굴에 둘렀다.
너무 덥기도 했고, 햇살이 따가웠다.
보기에는 정말 웃긴 모습이었겠지만, 혼자 왔는데 뭐 어때!
시골길을 한참 걸었다.
걷는 것은 즐겁다. 낯선 길이면 더 그렇다.
처음에는 걱정거리나 고민 등 온갖 상념이 떠오르지만, 이내 이런 것들은 사라지고, 고요만 남는다.
처음 보는 길을 혼자 걸으며,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나 풀 내음을 한가로이 즐겼다.
그렇게 1시간 30분,
발 아파..!
슬슬 버스를 탈 걸 그랬나 싶은 그때, 마침내 눈앞에 바다와 항구의 모습이 펼쳐졌다.
다 왔다. 종달항이다!
해안가에 다다르니, 지금까지 시골 풍경에 가려있던 에메랄드 빛 바다와 하늘, 그리고 저 멀리 우도와 성산이 보였다.
우도행 페리 표를 끊고 보니, 출발까지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바다와 산이 모두 보이는 정자에 올라가, 감자빵을 꺼내어 먹었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정말 어디를 가도 풍경이 예술이다.
잡초와 흙들조차도 물감으로 칠해놓은 것만큼 진하고 예쁜 색깔이 되어, 정자에 앉아있으니 유화로 둘러싸인 방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시간이나 여유가 남아 걱정했는데,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금세 시간이 지나갔다.
마침내 배를 타고 우도로 향했다.
햇살이 적당히 따스하고, 바람이 적당히 시원하고, 바다는 꽤 많이 아름다웠다.
우도에 들어가기 전부터 뱃삯으로 낸 만원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도에 입성하고, 미리 예약해 둔 전기자전거 업체를 찾았다.
어..? 왜 걸어서 30분이지?
분명 업체가 항구 옆이라 했는데...
알고 보니, 종달항에서 가는 배와 성산항에서 가는 배는 들어가는 항구가 다르단다.
여러분은 확인하고 가길 바란다...
어차피 날씨도 좋겠다. 오히려 좋아!
나는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우도의 시골길은 또 색달랐다.
작은 텃밭들과 돌담, 오래되었지만 잘 정돈된 건물들...
걷는 여행은 즐겁다.
차에 타면 빨리 갈 수는 있지만, 이동하는 동안 여행지와 나의 공간은 완전히 격리된다.
서울에서 차를 타는 경험과, 제주에서 차를 타는 경험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서울에서 걷는 것, 제주시에서 걷는 것, 우도에서 걷는 것은 모두 다른 경험이다.
무엇보다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면 A 지점의 경험과 B 지점의 경험은 다른 경험이지만, 걸어가면 이 모든 여행은 하나의 경험이 된다.
혼자 여행하니 길을 잘못 들어도, 오래 걸어도, 오래 쉬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이게 진짜 자유구나.
평화로운 풍경들을 눈에 새기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자전거 대여점에 도착했다.
전기자전거를 대여하여 무작정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우도의 해안가는 백사장은 물론, 산호가 퇴적되어 생겼다는 해변, 돌들이 쌓여있는 해변, 멋들어진 절벽 등 멋진 것들 투성이었다.
나는 매 순간 그림 같은 풍경을 마주하며 달렸다.
마치 비싼 풍경화 수백 장을 연달아 보는 기분이랄까, 자전거를 타면서 이렇게 사치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우도를 한 바퀴 돌고, 해안가에 있던 몇 개의 정자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정자에 다시 찾아가 자리를 잡았다.
바다, 돌, 하늘..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스콘을 꺼내 먹었다.
하루종일 맑은 하늘을 오래 봐서인지, 마음속에 쌓여있던 고민들과 스트레스도 이제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우도를 떠나는 배에 오르자, 갈매기떼가 우리를 쫓아왔다.
군대에 있을 때, 갈매기를 좋아하던 후임이 있었는데, 왜인지 알 것도 같았다.
푸른 하늘을 미끄러지듯 즐기는 새하얀 갈매기가 아름다웠다.
다시 제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보니 시간이 6시 정도 되었다.
조금 이르지만, 오늘은 피곤하니 슬슬 들어가야겠다.
오늘 방문할 게스트하우스는 히든스테이라는 곳인데, 정말 예쁜 골목길 사이 숨겨진 숙소였다.
같은 도미토리를 사용할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아서 여유롭게 게스트하우스를 구경했다.
예쁘고 깨끗하다. 숙소는 오늘도 성공!
이동 기록을 보니 오늘만 20km를 걸었단다.
뿌듯해라.
그렇게 걱정 가득했던 나 홀로 제주 여행은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가득 채워졌다.
내일은 비가 온다는데, 새로운 곳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곳들이나 찾아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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