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헤매었던, 2023년 회고
2023년 1분기 회고
2023년 상반기 회고
다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의 전역을 뒤로하고 두려움 반, 기대 반을 담아 2023년 계획을 작성한 지 1년이 흘렀다.
코로나로 집에서 1년, 군대에서 2년을 보내고 3년 만에 복귀한 사회는 즐겁고 반가우면서도 때로는 힘들고 피곤한 곳이었다.
예상보다 즐거웠던 일도, 힘들었던 일도 겪으며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새 12월이 되었다.
연구실에 들어가면 공부만 하며 한 해를 보내지 않을까 했던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한 해였다. 연구실에 들어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내 꿈과 전공에 대한 생각이 발전한 한 해였으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진 한 해였다.
할 말 가득한 2023년 회고, 시작한다.
학부연구생으로 1년을 보내며
전역 후 창업과 취직, 연구의 진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연구를 선택한 것이 작년 11월이었다.
연구실을 경험해 보기 이전에 생각했던 연구와 연구실을 경험해 보고 알게 된 연구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연구자의 삶을 알면 알수록 내가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고 힘든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동시에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즐겁고 보람 있는 측면도 많았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연구실에 들어가기 이전에 내가 생각한 연구는 단순히 논문을 쓰는 것 정도였다.
연구실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있으며, 뭔가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무언가 알아내면 논문을 적어 개제한다. 이게 연구인 줄 알았다.
올해 연구실에 들어와 실제로 마주한 연구는 이러한 내 상상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었다.
기존의 연구들을 분석하고 한계를 찾아내어 이를 극복할 가설을 세운다. 가설을 다양한 환경에서 세심히 검증한 후 정량적인 지표와 함께 정리하여 학회나 저널에 제출한다. 리뷰어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논문을 수정하고, 리뷰어들에게 내 논문의 의미를 주장하는 과정을 거쳐 개제가 확정되면 마침내 한 편의 논문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관계 기관에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연구의 성과를 보고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려운 연구 내용을 쉽게 설명하고 연구의 가치를 설득하는 기술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매년 매월 매주 등장하는 새로운 논문들을 공부하고 아직 누구도 밟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헤아리는 것, 내가 힘겹게 지나온 길을 다른 이들이 쉽게 지나갈 수 있도록 지식을 정리하고 다듬는 것.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짜릿한 일이다.
연구실에서 1년간 생활하며 이러한 과정 중 일부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일부는 옆에서 지켜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말이 기여한 것이지, 정신 없는 와중에도 내게 성장의 기회를 주고자 나에게 맡기고 선배들이 도와준 일들이 많았다.
정말 감사한 1년이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 역시 훌륭한 연구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담아 올해 목표들을 세웠었다. (2023년 계획, 2023 하반기 계획)
내가 목표를 잘 이뤘나 점검해보자.
커리어의 방향 잡기
막연히 컴퓨터 비전 연구를 하기로 결심하고 올 한 해는 구체적인 연구 방향을 잡으며 보내기로 했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1년간 연구실에서 생활하며 연구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볼 수 있었고, 연구 분야도 어렴풋이 정할 수 있었다.
나는 Strong Multi-modal Representation Learning을 연구하고자 한다. 한 가지 제한된 업무만 수행하는 현재의 AI에서 진화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유동적이고 강력한 AI를 만들기 위한 기반 연구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도전과제를 Situation Awareness와 Understading으로 분할하고, 학부 과정에서는 이 중 Awareness를 개선하기 위한 Information Refinement를 연구해보고자 한다. 당장 내년에는 Multimodal Information Filtering과 Information Fusion을 파볼 생각이다.
이제 내 시야는 넓고 목표는 명확하다. 목표 달성이다.
주 3회 이상 운동하기
향후 3년 이상을 연구에 매진하기 위하여 주 3회 이상 꾸준히 운동하기로 했었다. 이 목표는 당당하게 초과 달성했다.
6월 말 시작한 주짓수를 매주 3회 이상 나갔을 뿐 아니라 클라이밍과 러닝, 때때로 크로스핏까지 정말 다양한 운동을 즐겼다. 내가 평생에 운동을 즐길 날이 올 줄 몰랐는데, 주짓수가 날 바꿔놓았다.
주짓수를 배움에 따라 힘이 아닌 기술로 싸우는 경험, 불가능하던 것이 가능해지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근력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다른 운동들도 즐겁게 할 수 있게 되었다. 3월에 클라이밍을 처음 배웠을 때는 팔이 약해서 너무 어려웠는데 몸이 가벼워지자 실력이 단번에 오르는 경험은 정말이지 짜릿했다.
여전히 스파링을 하면 승리보다 패배가 많지만, 패배는 다음 승리를 더 값지게 만들 뿐이라는 것도 배웠다.
연구실 선배를 따라 간 주짓수가 이렇게 내 삶을 바꿔놓을 줄 몰랐는데, 이제 운동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수학과 영어 공부하기
수학과 영어는 내게 꼭 필요하면서도 막상 공부하자면 하기 싫은 것들이었다. 이 목표들은 일부 달성했다.
영어는 한 달에 10회 이상 말해보카 앱으로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결국 공부다 보니 썩 즐겁지는 않아도 소소하게 등수와 어휘력 포인트 올리는 재미가 있어 좋다. 다만 다양한 표현을 배우기는 하는데 빈칸 채우기만 하다 보니 말하기와 쓰기는 따로 공부를 좀 해야겠다.
수학은 원래 인터넷 강의를 보고 통계나 선형대수 공부를 더 하려고 했는데 영 의욕이 들지 않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만 이번 학기 들었던 수업에서 가볍게 접한 베이즈 정리가 재밌어서 괜찮은 책을 찾아 통계 공부에 다시 도전해보기는 할 생각이다.
일과 휴식의 균형 잡기
잘 못 쉬어서 일할 때 의욕 없고, 일을 다 못해서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면 했고 대체로 잘 지켰다.
주말마다 혼자서든 친구와 함께든 하고 싶었던 것을 잘하며 놀았고, 체력이 없을 때는 하루 날 잡고 푹 쉬기도 했다.
특히 전역하면 소소하게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다 즐겼다. ADEX에 다시 방문해 보는 목표도 이뤘고, 주짓수 체육관에서 다 같이 놀러 가기도 하면서 정말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쌓았다.
나를 찾아서
올해 목표 중 가장 어려운 것은 "좋은 사람이 되기"였다.
고백하건대 2023년은 내게 있어 방황의 해였다.
나는 금년의 대부분을 스스로에게 이질감과 약간의 혐오감을 느끼며 보냈다.
좋은 사람은 커녕 내가 보통 사람은 되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이유는 명확히 정리할 수 없지만 연초부터 때때로 나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상한 부분에 날카롭고 예민해지거나,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거나, 뜬끔없이 떠오른 지난날의 실수에 불필요하게 위축되는 일이 잦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기조차 버거워져서, 내 자아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는 항상 내 장점과 단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명확한 사람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도무지 이런 단순한 질문의 대답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찾기로 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라는 개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에서 즐거움을 찾는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는 평생을 게임과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이제 예전만큼 재밌지 않았고, 힙합도 더는 멋지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열정이 줄어든 것이 내 고민의 원인인가 싶어, 내가 좋아하는 것, 혹은 좋아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섰다. 누군가 새로운 것을 체험해 보자 하면 주저하지 않고 체험했고, 알고 있던 것들도 다시 도전해 봤다.
커피가 좋다. 이미 커피에 대해 좀 안다고 자부하는 나였지만, 더 많은 카페를 찾고 더 많은 커피를 마시고, 더 많은 커피 러버들을 만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커피부터 제과, 브랜딩까지 완벽한 모모스 커피, 매번 놀라운 커피를 찾아내는 블랙로드 커피, 서울, 제주, 일본을 오가며 만난 수많은 카페를 다니고, 거기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차담을 나누었다. 커피는 마시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다.
예술이 좋다. 이해하기 어려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예술에 다시 관심을 가져봤다. 여전히 고미술은 썩 좋아하지 않지만, 현대미술은 좋았다. 추상적인 작품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재밌다. 해설을 보고 알게 되는 작가의 의도나 배경이 내 예상과 맞으면 짜릿하다. 그림, 글, 사진, 음악, 영상.. 이야기가 담긴 것들은 뭐든지 재밌다. 특히 재밌는 건 건축이다. 잘 설계된 공간이 주는 의도된 감각과 어포던스가 좋다. 그 안에 담긴 설계자의 독창성이 좋다.
운동이 즐겁다. 평생 운동을 좋아한 적도 없었고, 좋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연구실 선배를 따라 간 주짓수가 생각보다 재밌었고, 주짓수를 하며 체력이 좋아지니 클라이밍도 재밌었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내 실력을 볼 때 행복하다. 근손실 신경 쓰느라 못 먹는 술과 음식이 아쉽지 않다. 운동 후 찾아오는 근육통이 반갑다. 나는 이제 운동이 좋다.
나 혼자 무계획 여행
어느 순간부턴가 남들 앞에서의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페르소나가 달라지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것이라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양디고 출신의 나, 대학교 친구들과 있을 때는 세종대 19학번 나, 일하고 있을 때는 연구원 버전의 나. 그런데, 아무런 수식어가 없는 그냥 백지오는 무엇인지 도통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혼자 제주도에 갔다.
제주도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볼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 없이, 그때그때 그 순간의 나에게 판단을 맡기며 여행했다.
나는 차갑고 계획적이라는 ENTJ지만, 가벼운 일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충동적이고 남들 앞에서는 점잖은 척하면서 보는 사람이 없으면 길에 보이는 강아지, 말, 새와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를 다시 정의하며
새로운 취미를 찾고, 혼자 여행을 다니고, 끊임없이 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으나, 항상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외면했던 내 단점을 마주하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고, 어렵게 찾은 내 삶의 방식이 내 현실적인 상황과 썩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방황 끝에 다시 본 나는, 내가 생각한 나 자신과는 상당히 다른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방황은 내가 스스로에게 기대했던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실제의 괴리를 인지하게 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한동안 예술가들이나 철학가들이 남긴 "예술은 자신의 창자를 꺼내어 놓는 것"이라느니 "글은 피로 쓰는 것"이라느니 하는 말을 들여다보며 동경과 동시에 불쾌감을 느낀 것은 내가 스스로를 포장하여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나 자신을 처음부터 돌아본 지금, 오히려 나의 결점들을 많이 알게 되었음에도 마침내 내 마음은 이유 모를 불안감과 이질감에서 해방되어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내가 좋아하는 <데미안>의 한 소절을 인용하면 좋겠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어째서인지 올초의 나는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원래의 나를 잊고, 나를 처음부터 돌아봤다.
그렇게 발견한 나는 이전의 나와 많은 부분에서 다르고 심지어 이전의 나보다 부족한 점도 많은, 썩 마음에 들지만은 않는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매일 더 나은 내일을 그리는, 틀림없는 나였다.
나는 내 기대만큼 이상적이고 좋은 사람은 못 된다. 그러나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거면 됐다.
2023년 계획글의 말미를 다시 보았다. 2023년이 지나 2024년을 맞이하는 내게 바라는 모습들이 적혀있었다.
더 맑고 또렷한 시야로 목표를 바라보고 있는 나이기를.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내 길을 걷고 있기를.
많은 어려움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하루하루 더 나은 사람을 꿈꾸는 나이기를.
이제 나는 연구자라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로 향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안다.
이 길이 어렵고 힘든 길임을 체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정직함과 솔직함, 꾸준함의 가치를 믿는다.
나는 내일, 내일 모래, 내년에 더 나은 사람일 것이다.
부끄럽지만 한때 나 정도면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 성숙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오만함의 결과로 한 해간 스스로에게 실망도 많이 하고, 방황의 시간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황을 금방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계속 꿈꿀 수 있는 것은 항상 내 주변에 모범이 되어주는 멋지고 좋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리라.
나도 당신들께 좋은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며, 2023년 회고를 마친다.
읽어주신 독자분들도 따뜻한 겨울이 되시기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