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에서 연구원으로 [2023년 상반기 회고]
전역, 연구실 합류, 개강을 거쳐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새 3학년 1학기가, 2023년의 절반이 지나가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지난 6개월을 보내며 내게 있어 가장 영향이 컸던 것은 단연 연구실일 것이다. 군대 2년, 코로나 1년으로 3년 만에 복귀한 대학교 대면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연구실에 실제로 들어가, 학부연구생의 한 학기를 보낸 낯선 경험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정말 많은 경험과 생각을 한 6개월이었고, 하루 빨리 회고를 쓰고 정리하고 싶어 기말고사 시험 기간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생각해 보면, 필자가 회고글을 작성하기 시작한 대학교 1학년 ~ 2학년에는 매번 뭔가 새로운 성과를 거두는 데 중독되어서 내가 달성한 성과에 대한 회고를 많이 진행하였고, 군대에서는 새로운 도전보다는 집단생활에 적응과 인간관계, 내 내면의 성장에 집중하다 보니 철학적인 회고를 많이 한 것 같다. 새삼 회고에 앞서 이전 회고들을 돌이켜보니 감회가 새롭다.
아무튼 이번 회고, 벌써 이 블로그에서만 9번째 회고인데, 이번에는 내가 달성한 것들과, 내 내면의 이야기가 반씩 들어가게 될 것 같다. 연구실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배우는 단계이기에 논문을 쓴다던지 실험을 하는 등의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소소하게 발전하고 이뤄낸 목표들이 있어 이러한 요소들을 돌아볼 것이고, 연구실이라는 새로운 조직에 적응하며 느낀 내 감정과 같은 내적인 요소도 돌아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2023년 3학기, 만 22세로 돌아가는 24세의 회고, 시작해 보자!
URP를 거쳐 연구실에 합류하다.
작년 11월, 전역을 앞두고 휴가를 나와 연구실 지도교수님인 최유경 교수님을 뵙고 1월부터 진행되는 학부연구생 프로그램(URP)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우리 연구실은 방학 동안 진행되는 2개월의 학부 연구 체험 프로그램(URP)을 일종의 채용연계형 인턴과 같이 활용하여, 2개월간의 연구실 체험과 교육을 마친 인원 중 새로운 연구원을 선발하고 있었다.
전역하고 연구실에 들어갈 생각은 했지만, 막상 전역 보름 후부터 바로 연구실에 합류할 생각을 하니 긴장도 되고 걱정도 많았다. 과연 URP는 쉽지 않았다. 주어진 기간별 목표에 맞춰 매일매일 아침 11시부터 대략 밤 8시, 늦을 때는 막차 시간까지 연구실에서 공부에 매진했다. 내 인생에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에서의 공부와 활동은 즐거웠다.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 실험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의 스트레스가 있었으나, 그보다는 고생 끝에 찾아오는 성공의 보람과 그 과정 자체의 즐거움이 컸다.
2개월의 URP를 거치며 연구자의 길에 대한 마지막 걱정들은 확신으로 바뀌어, 나는 3월부로 세종대학교 Robotics & Computer Vision Lab의 일원이 되었다.
논문, 논문, 또 논문...
URP를 포함하여 연구실의 첫 4개월간은 논문과 강의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려면 당연히 이전 기술들을 알아야 하기에, 2013년(때로는 더 이전) 경부터 나온 논문들부터 2022년까지 나온 논문들까지 따라잡기 위해, 선배들이 골라주는 논문들과 내가 관심이 가는 논문들을 끊임없이 읽었다.
확인해 보니 연구실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한 22년 11월 27일부터 지금까지 읽고 리뷰를 작성한 논문만 26편에 달한다.
덕분에 이전에는 영어 논문 하나를 읽으려면 큰 결심과 노력, 긴 시간이 필요했는데, 최근에는 꽤나 가벼운 마음으로 논문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논문을 읽는 시간도 줄어들고 집중력은 늘어났다.
확실히 하면 된다. 반복과 노오력이 정답이었다.
한편 읽으면 읽을수록, 논문의 장단점을 보는 시각, 문제를 정의하는 감각 등이 생기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 이전에는 논문이나 글을 볼 때 저자가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하는 면이 있었는데, 지금은 논리의 전개 방식, 그 근거의 타당성 등을 평가할 수 있는, 생각의 폭이 넓어진 느낌이다.
생각해 보면 이는 단순히 논문을 많이 읽은 것 외에도, 내 논문 리뷰를 피드백해 주며 논문에서 집중해야 할 부분이나 팁을 아낌없이 주는 선배들 덕분이 크다. 정말, 감사합니다. 🤗
병장에서 연구원으로
학부연구생이 되기 전에는 학부연구생이 뭘 하나 싶었는데, 이거 만만치 않다.
맡아야 할 책임도 있고, 의무도 있고, 사람들과 소통도 잘해야 한다.
내가 지난 2년을 보낸 정보체계관리단은 꽤나 수평적인 조직이었음에도, 역시 군대는 군대인지 사회에서 내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특히 슬랙, 이메일로 소통하는 건 매번 왜 이리 어색한지... 대화할 때는 나도 모르게 어색한 다나까가 튀어나가기도 하고... (정작 군대에서는 요가 튀어나갈 때가 많았다.)
연구실에서 흔히들 개인시간의 부족이나 업무량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이러한 사회적인 부분에 스트레스를 꽤나 받았다. 첫 4개월은 정말 뚝딱이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결국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이제는 연구실 선배들과 농담도 주고받고 잘 적응해나가고 있다. 항상 respect & friendly를 잃지 말고, 잘해보자고!
일에 대한 생각
연구실에서 공부와는 별개로, 수업 조교를 비롯하여 몇 가지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제 군대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돈 받은 만큼만 일해야지." 하는 식으로 일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기에 책임감을 갖고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연구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게 일을 맡겨주는 것에 감사하기도 해서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내 작업물을 돌이켜보면 "조금만 더 신경 쓸걸.." 싶은 부분이 보였다.
어떤 부분들은 충분히 잘했음에도 나 혼자 아쉬운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부족한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으리라. 디테일에 더 신경 쓰자.
아무튼 군대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정기적이고 제대로 된 보수를 받으며 책임이 요구되는 일들을 수행해 보니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책임의 무게, 보람, 일 자체의 어려움, 기술... 아직 많은 일을 해본 것도 아닌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나 왜 아직도 3학년..?
연구실의 생활과 더불어 대학교 3학년으로 살며, 역시 참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연구실에서는 막내인데 학교에선 화석 복학생이고, 그런데 사실 나도 내가 3학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운 와중이지만 오랜만에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들으니, 1학년 때 맛보기하고 코로나에 빼앗겼던 대학 생활의 낭만이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한 분야의 심화 지식을 같은 수준의 동료들과 배우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초미적분 재수강은 썩 즐겁지 않았다. 1학년때 잘할걸...)
캡스톤 프로젝트
캡스톤은 일반적으로 4학년 때 듣는 과목이자 공대생의 졸업작품 같은 느낌이지만 공학설계 학점이 딱 맞게 채워지기도 했고, 마침 프로그래밍을 잘하는 친구가 같이 프로젝트를 하자고 해서 조금 일찍 진행해 보았다.
우리 팀은 웹 개발을 담당할 내 친구와 친구의 지인 2명, 그리고 인공지능을 담당할 나로 구성되었다.
캡스톤은 지정주제로 진행되었는데, 우리가 희망한 지정 주제는 컴퓨터공학과 지정주제인 "딥러닝 기반 작물 성장 예측 서비스"였다. 이거라면 웹 개발자와 AI 개발자가 적당히 일을 나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데이터사이언스학과의 "딥러닝 기반 태풍 예측 모델"이 주제로 떨어졌다.
AI 개발자 한 명, 웹 개발자 3명으로 데이터사이언스학과 친구들과 AI로 경쟁하라고..?
태풍이란 주제도 참 낯설었다. 바다 사람도 아니고, 평생 태풍을 신경 쓰고 살아본 적이 없는데.
멘털 붕괴의 1주일을 보내고, 팀원들과 마음을 다잡고 타계책을 구상했다.
예측 모델은 내가 어떻게든 하고, 태풍 예측 정보 제공 웹 서비스를 기똥차게 만들어서 붙이자! 오히려 1+1 전략이다.
AI 모르는 개발자들과, 개발 모르는 AI 연구자의 좌충우돌 협업을 거쳐, 우리는 결국 태풍 경로 및 등급 예측 모델과 엄청 멋진 웹 서비스를 만들어 배포까지 해버렸다. 소논문과 포스터 중 택 1인 발표자료는 둘 다 내버렸고, 하다 보니 생각보다 잘 돼서 꽤 즐겼던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데이터사이언스학과 학생 없이 데이터사이언스학과 캡스톤에서 1등을 해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내가 영 잘 대처하지 못한 부분도 있는데, 팀원들을 잘 만나 잘 이겨낸 것 같다.
여러분 고마웠어요!
규칙적인 생활 with LifeOps
군대에서 반강제로 나름 규칙적인 생활(?)을 탑재하고 나온 것을 유지하고 싶기도 했고, 입대 전부터 TODO List를 만들어 일정 관리를 해오던 습관을 조금 더 발전시키고자 노션에 일정 관리를 위한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이름도 거창한 LifeOps 되겠다.
기존에는 간단히 노션의 할 일 목록 기능을 이용해 일들을 관리했는데, 그러다 보니 일정을 시간 순으로 정렬하기도 불편하고 조금 더 깔끔하게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노션의 DB 기능을 이용해할 일을 정리하니, 마감일이나 일의 종류(개인 약속, 연구실 일정 등)에 따라 일정을 필터링하기도 편하고, 일정마다 subpage에 메모를 남겨놓기도 편해서 좋았다.
처음에는 일정을 추가할 때마다 이것저것 분류해 주기가 귀찮기는 했는데, 그래도 일정을 잘 까먹는 내 단점을 이러한 노력으로 잘 극복한 것 같다. 이번 학기에는 일을 까먹어서 마감에 쫓기는 부끄러운 일이 없었다.
TODO List를 만들어도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에, 매일 자기 전과 일어난 후에 LifeOps에 그날 할 일을 정리하고 수시로 이를 확인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일을 하면서도 오늘 얼마나 할 일이 많이 남았는지 파악하기도 편하고, 삶의 효율이 한층 개선된 느낌이었다.
마감과는 별개로, 하루 종일 일정이 있는 것들은 구글 캘린더를 통해 관리했다. 예전에는 중구난방으로 일정을 적어뒀었는데, 연구실에서 일정을 관리하는 방식에 영감을 받아 일정 작성에도 간단한 규칙을 세웠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일정 제목 앞에 간단한 태그를 붙여주고, 시간은 뒤쪽에 적는 아주 간단한 방식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일정이 한층 보기 편해졌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올해 상반기는 아주 효율적이고 스스로도 편하고 뿌듯한 삶을 산 것 같아 보람차다.
이외에도 매일 고정된 시간에 하는 작업들(취침, 기상, 커피 내리기 등..)을 루틴 화하기도 하고, 최대한 계획적으로 살려는 노력을 수행했다. 다만 매주 토요일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쉬기만 하는 날로 두어 스트레스 관리도 잘했다.
와, 돌이켜보니 진짜 잘 살았다.
번아웃 이겨내기
흔히들 계획적으로 살려고 하면 일할 계획, 운동할 계획 같은 것만 세우고 쉴 계획은 잘 안 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계획을 했다가 번아웃이 온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기에, 이번에는 매주 토요일에는 무조건 쉬겠다는, 쉬는 계획도 포함하여 계획적인 삶을 살았다.
확실히 일주일에 하루라도 제대로 쉬어주니, 번아웃이 오는 빈도와 번아웃의 강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지난 6개월간 기억에 남는 번아웃이라야 2번 정도이고, 이들도 3일을 채 넘기지 않은 것 같다.
번아웃이 온 것 같을 때면 먼저 혼자 산책하는 시간을 가지며, 번아웃의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다음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지만 제대로 쉬었다.
잠이 모자라면 잠을 푹 자고, 최근에 너무 일만 했다면 심야 영화라도 한편 봤다.
이유 없는 번아웃은 없다. 돌이켜보면 번아웃이 꼭 나쁜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번아웃이 와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이유를 돌아보고 회복을 잘하고 나면, 오히려 번아웃이 오기 전보다 일을 잘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경험들
연구실이라는 고정된 일상이 생겨 개인 시간이 많이 줄어든 나날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남는 시간을 최대한 잘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올해에는 새로운 경험도 참 많이 한 것 같다.
혼자서 제주도 여행에 다녀오기도 하고, 예술에 관심이 생겨 전시도 참 많이 봤다.
학교에서 시켜서 한 것들이긴 하나, 봉사활동과 동양철학 공부도 했다. 할 때는 귀찮았지만, 돌이켜보면 모두 의미 있었다.
클라이밍도 해보고, 주말에 놀러 다니기도 많이 다니고, 영화도 많이 봤다.
공부를 하며 지식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는 느낌도 좋지만, 이러한 경험들도 정말 소중하다.
이런 느낌으로 내 2023년의 절반이 지나갔다.
시간이 참 빠르기는 빠르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돌이켜보면 뭔가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썩 나쁘지 않게 보낸 것 같다.
벌써 대학 생활도 50%를 넘어 5/8을 지나왔다는 생각을 하면 아쉽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대가 되기도 한다.
3학기 전의 나는 아직 수학이라면 벌벌 떨고 영어를 보면 울렁거리고, 물리학 수업 들으면서 고생하던 애송이였는데, 그래도 지금은 수학이랑 영어를 매일같이, 즐겁게 공부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3학기 뒤, 졸업할 때 내 모습은 어떨까?
아무튼 회고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매번 조용히 눌러주시는 하트와 광고수익에 많은 위로를 받는다.
여러분도 6개월 고생하셨고, 남은 6개월도 행복하게 보내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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