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게, 그러나 멀리 나아간, 2022년 회고
2022년은 참 오묘한 해였다.
군대에서 일 년의 대부분을 보내고 전역하면 12월 15일.
2주 조금 넘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는 24살, 대학교 3학년 복학생이 된다.
괜히 우울한 생각이 들어 매년 작성하던 신년 계획을 쉬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15일뿐인데 뭘 계획하란 말인가?
군대에 있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기는 싫었기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과, 그럼에도 무언가 하기 힘든 군대에서의 일상 사이에서 스트레스도 꽤 많이 받았다.
조바심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일들을 겪으며, 특히 철학을 배우며 생각을 많이 달리하게 되었다.
2022년은 어찌 보면 최근 몇 년 중 가장 얻은 것이 없었던 해이다.
얻어낸 상장도, 성공한 프로젝트도, 내 스펙을 높여줬다 할만한 성과는 없다.
그러나, 내가 가장 크게 성장하고, 많은 것을 얻은 해이기도 하다.
리더십, 팔로워쉽, 스킬 모두를 얻었고, 철학을 배웠다.
가장 낮게, 그러나 멀리 나아간 나의 2022년을 돌아보자.
코로나에게 시험받다.
연초부터 부대에 코로나가 퍼질 듯 말 듯하더니, 결국 2월 말부터 감염자가 폭증했다.
나름 부대에서 역할을 맡고 있던 나는 부대원 반 이상이 코로나에 감염되던 와중에 그 상황을 통제해야 했다.
일단 부대 전체가 격리라고는 해도, 코로나가 확실한 사람, 의심되는 사람, 멀쩡한 사람을 분리하고, 모두의 식사와 화장실 이용 시간을 조율하고, 누군가는 미친 듯이 쏟아지는 쓰레기도 버려야 했다.
부대 간부, 방역대책본부, 타 협력 부서 등에서 걸려오는 전화들을 받고 설명과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사람도 필요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회, 운영진 등에 나서 봉사하는 걸 좋아했던 나지만, 이제는 정말 그만할 때가 됐다고 느낄 정도로 쉽지 않은 시기였다.
체력적, 정신적으로 그렇게까지 몰려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내게 있어 의미 있는 스트레스 테스트가 되었다.
어찌 보면 재난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도움을 줘야 할지 생각해 보고 적용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임기응변 능력을 비롯한 일머리가 좋아졌다.
그 이후로 자신감도 많이 생겨서, 이때를 기점으로 사무실 간부님이나 동료들의 평가도 꽤 좋아졌던 것 같다.
당시 상황이 자세히 궁금하다면, 그 당시 쓴 회고 글을 봐주시길 바란다.
두 번의 창업 도전, 네 개의 아이템
연초에 진행된 2022 공군 창업경진대회에 참여하였다.
첫 아이템은 대회 포스터를 보자마자 번뜩 떠오른 아이템이었고, 나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아이템을 갈아엎었고, 그다음부터는 솔직히 확신 없는 아이템을 대회 때문에 밀어붙인 느낌이다.
2022년 뭐라도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가득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리더가 되어 창업 팀을 꾸리고, 계획을 세우고, 서류를 작성했다.
내가 만든 아이템의 비즈니스 모델과 TAM SAM SOM 분석을 하고, 평가받고, 설득하고...
이 대회를 진행하며 세 가지 아이템을 만들고, 창업 계획을 작성했다.
2020년에 창업을 도전했던 경험이 내게 기술과 창업의 기본을 알려줬다면, 이번 경험은 리더십과 현실적인 창업 감각을 주었다.
창업경진대회 이후로는 지인 분의 소개로 만난 창업 팀에 개발자로 참가하여 창업에 도전하게 되었다.
상당히 의미 있고 멋진 아이템이었는데, 모르는 사람들 창업팀에 껴본 것은 처음이라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름 의견을 낼 만한 부분이 있었지만, 나와 초면인 팀원들에게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얘기를 해야 할지 참 어려웠다.
군대에 있어 참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개발 실력과 협업 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방황 중 만난 니체
니체.
철학과 자기 계발서라면 알레르기가 돋던 내게 평생 가까워질 일 없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다.
철학이라면 실존하는 현상을 두고 엉뚱하고 추상적인 의미를 찾는 학문인 줄 알았다.
2022년 여름, 나는 무엇도 이뤄내지 못하고 한 해의 반을 보낸 것에 절망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어 방황하다가, 동기가 추천해 준 독서 동아리에 가입했다. 솔직히 유령회원으로 지내려다가, 한 번만 나가보잔 생각에 나갔다.
첫 책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였다.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과 모여 얘기를 나누는 것이 나름 나쁘지 않았다.
독후감을 써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몇 시간 책 읽고 나가서 수다나 떨면 되니, 당시의 내게 적당한 압박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페스트』얘기를 하다가 철학적인 얘기가 나왔다.
생각보다 철학이라 해서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각 등장인물이 그 순간 어떤 판단을 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더라.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카뮈의 책을 더 찾아봤다.
『시지프 신화』를 읽었다.
시지프는 신들을 모욕한 죄로 무거운 바위를 산 꼭대기로 굴려 올린다.
그런데 그 바위는 둥글어서, 뾰족한 산 꼭대기에 기껏 올려놓으면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게 우리의 삶이란다.
어차피 떨어질 바위를 계속해서 산 위로 굴려 올리는 것.
충격적이었다.
평생 안 들여다보던 철학책들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니체를 만났다.
그때 갑자기, 하나가 둘이 되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내 옆을 지나갔다.
- 니체, <즐거운 학문>
니체는 산책 중 얻은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감을 위 문장과 같이 표현했다.
이 문장은 나를 니체에게 이끌어주었다.
그의 사상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듣던 데로 쉽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니체는 내가 내 결점을 부끄러움이 아닌 반가움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하였고, 내 장점을 오만이 아닌 자신감의 근원 삼을 수 있게 하였다.
니체와 필자의 만남에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아래에 있는 필자의 이전 글을 봐주시길 바란다.
군대에서도 계속한 도전들
컨퍼런스를 만들다.
필자가 전역한 공군 정보체계관리단은 참 좋은 부대였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 사이에서 자연히 좋은 점들을 많이 닮을 수 있었다.
내 군생활의 소소한 자랑거리는, 그런 부대에서 최고의 지식 공유 행사를, 내가 만들어놓고 나왔다는 것이다.
추석, 설 연휴마다 컨퍼런스를 진행하고, 휴가에 필요한 가점을 소정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나도 22년 두 차례 발표를 진행했다.
"개발자를 위한 셀프 브랜딩"과 "사지방 코딩을 위한 code-server 구축하기"를 주제로 발표했다.
code-server 발표는 실용적이었다고 좋아한 사람이 많았고, 셀프 브랜딩은 몇몇 분이 추후 구체적인 질문을 주시고, 실제 적용하셨다. 새삼 뿌듯한 일이다.
해커톤 도전
국방부에서 진행하는 2022 OSAM 해커톤에도 도전했었다.
친한 친구 한 명과 함께 했는데, 친한 사람과 두 명이서 뭔가를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더라.
작년에는 입상이었는데, 올해는 장려상에 그쳐 아쉬웠지만, 개발과 협업 기술을 키울 기회가 되어 의미 있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만큼 git 버전관리와 코드 컨벤션을 잘 지킨 적이 없어 뜻깊다.
이걸 기본값으로 삼아야지.
연구자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백 병장의 CV 부수기
군대에서 하던 개인적, 공적인 프로젝트를 모두 마치니 전역까지 딱 2주 정도 시간이 남았다.
다들 나한테 이제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면서, 쉬라고 하더라.
나로서도 뭔가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도 딱히 없고, 쉬는 것도 괜찮겠다 싶긴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뭔가 하면 의미 있겠단 생각도 들더라.
솔직히 내가 7년이나 컴퓨터를 배우며 관련 분야를 폭넓게 안다고 자부하지만, 깊이 아는 것은 없었다.
이참에 내가 나아갈 컴퓨터 비전 분야를 어서 깊이 배워보고 싶었다.
2023년 초에 도전할 URP에서 SGD를 배운다기에, 딱 그전까지 나온 CV 모델들을 훑고 가기로 결심했다.
부담이 안 되는 선에서, 주말마다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모델과 논문을 공부했다.
그렇게 탄생한 프로젝트가 백 병장의 CV 부수기이다.
군대에서 마지막 3번의 주말을 사용해서, 6편의 논문을 배웠다.
나다운, 자랑할만한 군생활의 마무리였다.
길고 길었던 2022년을 마치며
군대 얘기 좀 그만하고 싶은데, 안 할 수가 없다.
난 2021년의 뒷부분 9개월 15일, 2022년의 앞부분 11개월 14일을 군대에서 보냈다.
2021년 초의 내게 이 사실은 끔찍하고 절망적이었다.
22살과 23살을 모두 잃는다니.
군대는 내 시간을 약속한 만큼, 법대로 가져갔다.
그러나 나는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자랑스럽고, 의미 있는 경험들을 얻었다.
나와 함께한 사람들이, 내가 읽은 책들이, 내가 공부한 자료들이 준 것이다.
물론 힘든 기억, 끔찍한 경험들도 많았다.
여기에는 적지 않을 개인적인 경험들, 그들 중 일부는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런 경험들조차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되리라 믿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나는 더 이상 헤매지 않는다.
스펙에 대한 압박, 앞서가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을 대신할, 계속해서 나아진다는 믿음과 자신감을 얻었으니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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