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가 행복하기를 [2023년 1분기 회고]
오랜만에 회고 글을 쓴다.
가장 최근에 쓴 회고 글은 작년 12월 27일, 그러니까 약 3개월 전에 작성한 2022년 회고였다.
사실 저 글을 쓸 때,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한 기분,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한 기분이 들어서 영 찜찜했다.
그래서인지 1월부터 회고를 썼다가 지우기를 몇 차례 거듭하다가, 이내 준비가 되면 써야겠단 생각에 의도적으로 글쓰기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에야 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자리에 앉으니, 이전에 내 글쓰기를 방해했던 것이 뭔지를 알겠다.
요컨대, 나는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확한 계획과, 순조로운 진행.
분명히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었고, 내 삶은 상승곡선을 그리며 잘 풀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저 아래 어두운 지역 최저점에 갇혀,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전역하면 몸 조심하라더니.
전역하면 몸 조심하라더니, 아니나 다를까 전역하고 바로 독감에 걸려 일주일을 앓아누웠다.
독감을 이겨내고 나니, 몇 년을 아무 문제 없이 지나다니던 옷장에 발가락을 찧어 전치 1개월 이상의 부상을 입었다.
억울하기보단 상황이 재밌어 웃음이 나왔다.
불운한 일이 연속으로 닥쳤지만, 그럼에도 내 인생은 확실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날 21개월간 묶어두던 군대에서 당당하고 건강하게 전역했고, 날 21개월보다 조금 더 길게 괴롭히던 개인적인 문제들도 하나 둘 해결되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고 기대되는 목표가 내 앞에 있었다.
연구실 진학하기.
11월 마지막 휴가 때 교수님과 상담을 통해 연구실 진학을 마음먹고, 1월부터 연구실에 다니게 되었다.
2개월간 체험 기간을 갖고, 계속하기로 얘기가 되면 정식으로 연구실의 일원이 된다.
애초에 공부가 해보고 싶어 진학한 대학교이고, 대학에 진학한 후 내 꿈은 <인류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었기에, 연구가 꽤나 잘 맞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워낙 대학 연구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안 좋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내가 연구실과 같은 환경이 잘 맞는지 확신이 없어, 일말의 걱정이 있기는 했다.
결과적으로, 2개월간 나는 연구가 내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진학하게 된 연구실이 내 성향과 잘 맞기도 했고, 생각보다 연구라는 분야 자체가 나와 상당히 잘 맞았다.
긴 시간 공부하고 헤매는 것은 역시 힘들었지만, 그 결과가 좋을 때 느끼는 짜릿함은 더욱 강렬했고,
연구자의 삶이 고독하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럴 틈 없이 즐거운 경험이었다.
23번째 봄을 맞으며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새 봄꽃들이 폈다. 전역하던 날 눈이 펑펑 내려서, 전역식이 2시간 미뤄진 일이 떠올랐다.
시간이 참 빨리 가는구나.
작년 11월, 첫 컴퓨터 비전 공부로 R-CNN 논문을 읽으며 솔직히 막막했다.
그제야 2014년 논문을 읽으면서 도대체 언제 최신 연구들을 다 따라잡고 새로운 지식을 깨달아 논문을 작성한단 말인가?
4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2019년 논문을 읽고 있다. (물론 그 사이에 나온 논문들 중에 못 읽은 논문이 많지만)
3개월 전만 해도 논문 구현 코드를 잘 쳐다보지도 않았던 나지만, 이제는 논문 구현에 대한 부담도 그리 크지 않다.
아직 갈길이 멀지만, 분명히 나는 성장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봄을 맞으며 문득 지난 3개월간 내가 글을 쓰지 못하게 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아쉬움.
왜 그 힘든 시간들을 더 잘 이겨내지 못했을까.
왜 그때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왜 왜 왜...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감정이 고작 아쉬움이었음을 깨닫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2019년 봄, 대학교에 갓 들어온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이나 했을까?
대학교에 가야겠다는 막연한 결심을 한 2018년의 나는 어땠을까?
특성화고에 진학하며 대충 취직해서 먹고살자는 생각을 하던 2016년의 나는?
학교 폭력에서, 고향에서 도망쳐 먼 곳의 중학교로 전학을 가던 2013년 봄의 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여느 사람들의 삶처럼 내 삶도 끊임없이 좋은 순간과 나쁜 순간이 파동처럼 번갈아왔지만, 그중에도 가장 깊은 바닥으로 내려갔던 시간들이 2012년과 2022년이 아니었나 싶다. (괜히 local minima라 한 것이 아니다.)
항상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혹은 그런 척이라도 하려고 하지만, 막상 힘든 순간 앞에 서면 매번 내가 작은 사람임을 느낀다.
그러니 그럴 때는 그냥 살자.
언젠가 있을 좋은 날들을, 최고점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행복할 날들을 그리면서.
잘 이겨내든 어렵게 이겨내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웃을 날은 오니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매일은 초등학생 백지오가 꿈꾸던 과학자의 매일이며, 중학생 백지오가 꿈꾸던 개발자의 매일이며, 고등학생 백지오와 병장 백지오가 간절히 바라던 대학생 백지오의 날들이니까.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며 끝을 맺는다.
나는 시지프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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