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마주한 개인은 어떻게 집단이 되는가 [알베르 카뮈 - 페스트]
우리 부대에는 독서 동아리가 있다.
2주일간 책 한 권을 선정하여 독서하고, 다 같이 모여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것이 썩 멋있어 보여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도 참여해보았다.
대망의 첫 책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1947년 생에 전반에 걸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카뮈가 쓴 책으로, <이방인>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고 한다.
나는 책이나 영화 등을 처음 접하기 전에 최대한 배경지식 없이 보는 걸 선호해서, 딱 이 정도로만 알고 페스트를 읽었다.
<페스트> 줄거리
1940년대 유럽의 도시 오랑 시에 페스트 전염병이 퍼지고, 도시는 유럽 전체의 안전을 위해 봉쇄된다.
도시의 의사 "리외"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 전염병으로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말단 공무원인 "그랑" 역시 도시의 봉쇄와 전염병의 피해 대처를 위해 성심껏 일한다.
한편, 파리에서 잠시 오랑을 방문한 기자 "랑베르"는 졸지에 낯선 도시에 갇혀 연인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어떻게든 도시를 빠져나갈 방법을 몰색 하고, 밀수꾼 "코타르"는 봉쇄된 도시 안팎으로 사람과 물건을 나르는 밀수를 하며 돈을 좇는 등, 혼란에 빠진 오랑 시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생존해나가는데...
<페스트> 결말
전염병으로 인한 봉쇄가 길어지자 시민들은 점차 봉쇄에 익숙해지고, 전염병을 이겨내기 위해 보건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
판데믹 초기 페스트가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 떠들던 독실한 신부 "파늘루"는 보건대에서 활동하던 중 어린아이가 페스트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고뇌에 빠져들고, 이기적이게 도시를 벗어날 생각을 하던 파리 출신의 기자 "랑베르"는 자신이 오랑 시민들과 운명을 함께하게 되었음을 받아들이고 보건대를 돕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전염병이 잦아들고 오랑 시의 모두가 활기를 찾아가던 중 누군가 도시 한가운데에서 총기 난사를 벌이는데, 그는 다름 아닌 밀수꾼 "코타르"였다.
의사 "리외"는 그 모습을 보며 페스트는 끝이 났으나 그들이 되찾은 이 행복이 언제든 다시 위협받을 수 있음을 느끼며 소설은 끝이 난다.
코로나19 시대, 페스트는 정말 끝이 났는가
소설 <페스트>를 읽으며 놀란 점은 20세기의 작가가 쓴 가상의 이야기 속 오랑 시민들의 모습이 오늘날의 우리와 너무 닮았다는 점이다.
도입부에서 도시의 쥐들이 의문의 질병으로 죽어나가고, 정체불명의 질병이 퍼질 때 의사 "리외"를 제외한 시민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조만간 페스트가 도시를 덮쳐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고, 성직자 "파늘루"는 신의 징벌이라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논리로 사건을 바라본다.
한편 공무원 "그랑"은 "리외"와 연락하며 도시의 봉쇄를 진행하고, 사랑하는 연인의 곁으로 돌아가고픈 "랑베르"는 도시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자신만은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며, 도시 밖으로 벗어나기를 원한다.
소설의 전반부는 우리가 코로나19를 맞이하고 처음 마주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누군가는 상황을 통제하려 하였고, 누군가는 두려워했으며, 누군가는 통제에 저항했다.
한편, 밀수꾼 "코타르"와 같이 위기 속에서 개인의 기회를 찾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의 사건을 함께 겪는 공동체 속에서 모두가 다른 반응을 보였지만, 그 모습은 20세기 소설과 21세기 현실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설이 중후반부에 접어들며, 사람들은 초반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페스트로 고통받는 아이를 보며 신앙에 의심을 품는 "파늘루" 신부나 두려움을 이겨내고 연대하여 보건대를 조직한 오랑 시민들도 놀라웠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랑베르"의 보건대 참여였다.
"랑베르"는 소설 시작부에서 오랑 시에 잠시 방문한 본인은 오랑 시의 문제인 "페스트"와 관련이 없으며, 자신이 오랑 시를 탈출하려는 행동이 사랑을 좇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변호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페스트가 퍼진 도시에 머물며, 그는 더 이상 페스트가 오랑 시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느끼고 보건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렇게 되자 개인의 운명이란 더 이상 없었고, 페스트라는 집단의 역사와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감정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코로나19에 맞서 우리 사회는 개인들에게 전례 없는 통제와 연대를 요구하였다.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 개인정보라고 느낄 수 있는 동선이나 건강 상태의 제공까지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많은 반발과 충돌이 있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어느새 당연한 일상이 된 것들이 많다.
불과 1년 반 정도 전까지만 해도, 전 국민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백신 접종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설 <페스트>는 마치 재난을 개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집단으로써 이겨내는지 관찰하여 작성한 모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시대, 다른 문화권의 우리가 코로나19라는 다른 재난을 마주하고 보인 모습이 소설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 소설을 읽고, 인류가 언제나 큰 재난 앞에 연대하여 잘 이겨내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도, 부정적인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21세기의 우리가 재난 앞에서 보인 본모습이 20세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면, 인류는 진정 발전하고 있는 것인가?
전쟁과 전염병, 재난 앞에 선 개개인들의 모습
소설을 읽고 알베르 카뮈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하였고, 그 또한 2차 세계대전을 겪고 <페스트>를 썼더랬다.
1차 세계대전의 이명은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이었다고 한다. 그 이명이 무색하게 전후 20년이 지나지 않아, 새로운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국가 차원에서 전쟁은 외교이지만, 개개인에게는 그저 전염병과 다르지 않은 재난에 불과하다.
알베르 카뮈는 그런 면에서 <페스트>를 쓰기 전 평생을 재난 앞에선 개인이자, 다른 개인들의 관찰자로 산 셈이다.
혼자서 감당하기에 너무나 큰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절망하고 혼란스러워하지만, 이내 연대하여 재난을 넘어선다.
그리고 또 다른 재난을 맞이한다.
그는 이 굴레에서 희망을 보았을까, 아니면 절망을 보았을까?
개인과 사회 구성원의 사이에서
독서 동아리에서 <페스트> 이야기를 나누다가 흥미로운 점을 찾았다.
<페스트>에서, 오랑 시의 시민들은 국가 혹은 세계인의 안전을 위해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다.
초반부의 "랑베르"는 당국의 이러한 결정에 반발하며 봉쇄를 뚫고 연인을 만나러 갈 길을 모색한다.
이러한 처지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우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우리나라 국민 개개인에게 "나라를 위해 2년간 복무할 생각이 있느냐?"라고 질문하면 많은 이들이 내키지 않아 할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 강한 군대가 필요하냐?"라고 묻는다면,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개개인의 욕망과 사회의 현실은 많은 경우 충돌한다.
그러나 사회는 교육과 법, 때로는 무력을 통해 사회의 목표를 달성하고는 한다.
군대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지난 2년간 야외에서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고, 돈을 벌고자 하는 자영업자들의 영업시간을 제한하였으며, 위반자에게는 법적 조치도 취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사회의 필요와 인간의 욕망은 충돌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째서 희생하는가
소설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공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영웅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의사 "리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인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그 성실성이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사회의 현실과 인간 욕망의 충돌은 때로는 마스크를 쓰느냐 마느냐로 끝나지 않는다.
알베르 카뮈가 마주했었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맞이하고 있으며, 언젠가 우리가 마주할지도 모르는 전쟁이나 재난 앞에서, 때때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사회를 위해 희생해야 할 수 있다.
카뮈는 "리외"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사회 현실과 개인의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 발생하는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성실함이며 참된 모습이라고.
무의미함을 사랑하라: <시지프 신화>
카뮈의 또 다른 책 <시지프 신화>에서 위에서 다룬 주제에 대한 카뮈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시지프"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을 기만한 죄로 무거운 바위를 밀어 산 꼭대기에 올려놓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그 산은 꼭대기가 뾰족한 산으로, 힘들게 바위를 밀어 정상에 다다르면, 바위가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져 처음부터 다시 바위를 올려야 하는 영원한 형벌이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우리의 삶이 곧 시지프의 형벌이라고 비유한다.
먹고, 자고, 씻고 일하는 행위를 평생 반복해야만 하는 우리의 삶은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 시지프와 닮아 보인다.
한편,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우크라이나 전쟁, 페스트와 코로나 등 극복해도 극복해도 계속 찾아오는 재난도 시지프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행동(바위 밀어 올리기, 살아가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라고 한다.
1. 무의미한 행동을 중단하거나
2. 받아들이고 회복하는 것
카뮈는 시지프(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라"거나, "의미 없는 짓 하지 말고 포기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성실하게,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바위를 밀어 올리라고 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대체로 개인에게 무의미한 일이다.
국가를 지켜내더라도 내가 죽는다면,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라도 내가 불편하다면 그것은 내게 무의미한 행동이다.
그러나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부조리 함마 저도 사랑하며 성실히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카뮈가 찾은 삶의 이유이자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마치며
<페스트>는 솔직히 재밌는 책은 아니었다.
소설 자체에 서스펜스나 갈등이 크지 않고, 서술자 "리외"가 쓴 일기와 같은 느낌이 든달까.
그러나 책을 읽고 사색에 빠지거나, 다른 이들과 토론하기에 <페스트>는 정말 좋은 책이다.
책을 읽으며 올해 초 부대에서 코로나가 퍼졌을 당시의 상황이 생각났다.
000명이 모여 생활하는 부대에서 발생한 재난을 앞두고 나의 모습은 어떠했던가.
지금도 국가를 위해 군대에 있는 나는 어떤 마음으로 복무를 하고 있었던가.
우리는 가끔 우리가 어떤 사회의 구성원임을 잊곤 한다.
<페스트>는 우리 같은 개개인으로 구성된 사회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나아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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