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것 같을 때 배우는 니체 철학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은 필자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공군 내부 커뮤니티에 작성하였던 글을 다시 적은 것입니다.
댓글 작성자 분들의 신상은 보안을 위해 일부 비식별화하였습니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른한 하루를 보내다 보면,
혹은 큰 불행을 겪거나, 큰 행복이 지나가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스스로를 돌아보면,
"나는 왜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곤 합니다.
이 의문은 말 그대로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일 수도 있고, (Why)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는, 삶의 과정이나 자세에 대한 의문일 수도 있으며, (How)
궁극적으로, 나는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인 것 같습니다. (Who)
저는 특성화고-공대 테크를 밟아온 진성 공돌이로써 입대 전까지만 해도 철학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었습니다.
철학은 불확실하고, 명확히 존재하는 세상을 측정할 수 없는 잣대로 멋대로 규정하는 학문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입대한 군대에서 저는 위에 적은 의문들을 가졌고, 고민하고, 우연히 만난 니체에게서 그 해답을 얻었습니다.
비록 니체의 사상을 제대로 소개할 정도로 제 이해가 깊지는 않지만, 이 글을 통해 독자분들이 철학과 니체에 대한 영감과 관심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때 갑자기, 나의 여인이여, 하나가 둘이 되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내 옆을 지나갔다.
- 니체, <즐거운 학문>
니체가 살았던 19세기는 수천 년간 유지되어 온 기존의 기독교적 가치관들이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 이념에 의해 서서히 위협받던 시기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적 가치관은 단순히 신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이 신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이며, 현생의 선행과 업보가 모두 사후세계에서 보상받거나 심판받는다는 당대의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과 운명은 신의 계획이기에, 주어진 운명대로 살다가 죽으면 영원하고 자유로운 사후세계에서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과학과 문화의 발전은 점차 사람들이 의문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신체가 죽으면 그의 정신도 사라지며, 우리가 삶이라 할만한 것들이 완전히 종료된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임을 예측했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면, 도대체 왜 지금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고민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온 우리나라 청년들의 고민들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행복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다면,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해야 해!
그런데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이 내가 바라는 것인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무언가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 자신을 뛰어넘어,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자신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위버멘쉬 사상의 등장입니다.
위버멘쉬라는 단어보다는 "초인"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니체는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위버멘쉬(Ubermensch)라고 얘기합니다. 이 단어가 처음 번역되어 들어올 때, "초인"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위버멘쉬의 의미는 "초인"과는 사뭇 다릅니다. "초인"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은 비범인(superman)을 의미한다면, 위버멘쉬는 "극복하는 자"입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위버멘쉬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위버멘쉬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낙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억압과 마주합니다. <차라투스트라>에서 니체는 이를 가장 강한 용에게 비유합니다.
그 용의 이름은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입니다.
용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너는 공부를 해야 한다." "너는 법을 지켜야 한다." "너는 경박하게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그 용에게 따르지 않으면 용은 우리를 위협합니다.
"내 말을 거역하면 처벌을 받을 것이다." "부모의 말에 거스르는 것은 불효이다."
니체는 인간이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쳐진 줄 이라며, 그 사이를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합니다.
낙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입니다.
낙타는 순종적인 존재입니다.
주인이 등에 많은 짐들을 싣고, 가혹한 사막으로 끌고 가더라도 묵묵히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낙타의 진심이 아닙니다. 낙타는 불복종을 택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주인에게 복종하지만, 그 안에는 주인에 대한 원망이 쌓입니다.
사자는 반항하는 존재입니다.
사자는 무서운 용이라도 자신의 뜻과 다르면 거침없이 맞섭니다.
그러나 사자는 고독합니다. 사자는 용과 싸우며 상처 입히고, 상처 입습니다.
어린아이는 즐기는 존재입니다.
어린아이는 도덕이나 규범을 잘 모릅니다. 그렇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바라고 옳다 생각하는 행동을 하고, 그것을 즐깁니다.
어린아이를 유심히 지켜보면, 어린아이가 웃지 않고 있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선택과 행동이 놀이입니다. 그들은 얽매이지 않으며, 언제나 창조적입니다.
또한, 어린아이는 잘 잊습니다. 지난날에서의 고통에 얽매여 후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면서도, 그 결과가 부정적이었다는 기억에 붙잡히지 않습니다.
니체는 인간이 지향해야만 하는 위버멘쉬의 경지가 어린아이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위버멘쉬는 타인이 정한 도덕적 관념이나 잣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을 창조하여 행동합니다.
창조성은 무조건 순종하거나 무조건 반항하는 낙타나 사자에게는 없는, 인간과 짐승의 경계입니다.
또한 위버멘쉬는 고통이나 역경에 굴하지 않고, 그마저도 삶의 일부로 사랑합니다.
어린아이는 뛰어놀다가 넘어져 다치더라도, 잠시 울다가 금방 잊어버리고 다시 웃으며 뛰어놀기 바쁩니다.
니체는 인간이 반복되는 삶의 고통 속에서도 이를 사랑하고 즐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아래에서 설명할 영원회귀와 연결됩니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번!"이라 외치기 때문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마주합니다.
더 최악인 것은, 이들 중 대부분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한 주를, 한 달을, 한 해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하루하루는 얼핏 보기에 달라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매일 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한 고통을 받으며 늙고, 죽습니다.
우리는 평생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있어서, 깨달음을 얻어서 기뻐하고,
돈이 없어서, 사랑하는 이와 다투고 이별해서, 자신이 초라해서 고통스러워합니다.
죽음은 이런 고통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육신에서의 해방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죽음은 인생의 완성이자 마침표일 뿐 더 나은 무언가로의 해방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꼭 죽음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해방에 대한 환상을 품습니다.
대학교에 가면, 대기업에 취직하면, 훌륭한 상대를 만나 결혼하면, 은퇴하면...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들이 보상받고 평안함이 가득한 삶이 나타날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현실을 즐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아모르파티)이 인간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말합니다.
삶은 행복뿐 아니라 고통을 포함하여 영원히 반복되는 것임(영원회귀)을 받아들이고, 그렇기에 매 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 것을 요구합니다.
영원회귀는 앞으로 오늘 하루만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반복되는 오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매 순간을 사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만약 미래의 해방을 꿈꾸며 오늘을 보냈는데 오늘과 같은 하루가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절대로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회귀를 인정할 용기를 가지고 괴로운 날이나 즐거운 날이나 하루하루를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산다면, 오늘 죽으나 10년 뒤에 죽으나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
위버맨쉬는 무엇인가?
니체의 책은 어렵기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난해하다 싶을 정도의 문체와 비유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줌과 동시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니체는 자신의 책이 이해하기 쉬운 책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부제는 <모두를 위한, 그러나 모두를 위하지 않은 책>입니다.
이는 누구나가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위버멘쉬가 될 가능성이 있으나,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라 합니다.
니체 철학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차라투스트라>를 읽는다고 위버멘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을 깊이 혐오할수록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을 아끼되, 완벽하다고 여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부끄럽고 추악한 점을 많이 알수록, 이로부터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악취를 풍기는 것마다에는 지혜가 숨겨져 있다. (중략)
오, 나의 형제여, 세상이 오물로 뒤덮였다는 말은 세상이 지혜로 가득 차 있다는 말과 같다.
위버멘쉬는 극복하는 자입니다.
완벽한 존재는 무언가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위버멘쉬는 우리가 지향하고 마침내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닌, 살면서 꾸준히 견지해야 할 자세입니다.
매 순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며, 그 결과가 고통이던 행복이던 받아들이고, 이 모든 여정의 끝이 죽음이라 하더라도 삶이라는 과정 자체를 사랑하고 즐기는 존재이며,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 삶을 다시금 반복하겠냐고 묻는 질문에, "좋다! 다시 한번!"이라 외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바로 극복하는 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이해하는데 함께해주시고 많은 도움과 영감을 주신 공군 00부대 독서동아리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래의 내용은 해당 글에 달린 답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분량 상 모든 반응을 옮기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홍ㅇㅇ 일병: 글 잘 읽었습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뭔가 니체의 생각을 난해하게 표현한 책 같네요. 동시에 근거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답: 굳이 난해하게 표현했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글을 깔끔하게 다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차라투스트라>에 "글은 피로 써야 한다."라고 말하는 문단이 있습니다. 독자를 고려하여 글을 쉽게 풀어쓰면 독자가 글을 읽기에는 편리하지만 본래의 뜻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독자가 진정으로 깊게 저자의 생각에 대해 고찰하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니체는 고의로 자신의 떠오르는 생각들을 최소한으로 다듬어 글을 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제시하는 사상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도록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철학이라는 것이 자명한 진실을 증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시각에서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니까요.
김ㅇㅇ 병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람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에 비유한 부분이었습니다.
단순히 각 생물의 행동에 비추어 비유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어린아이 이외의 부류들은 모두 짐승이더군요.
저 스스로는 낙타와 사자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아직 짐승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침저녁을 못 먹고 근무 상번을 해서 화가 굉장히 났던 상황이었는데 이조차도 즐기고 사랑해보겠습니다...
이ㅇㅇ 일병: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실제로도 어려운 책이고, 니체 저서의 최종 보스 느낌의 책이기 때문일 겁니다.
정동호 판 <니체>나 <How to read 니체> 등의 니체에 대한 해설서나 좀 더 난이도가 낮은 <도덕의 계보>나 <선악의 저편>을 먼저 읽고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 좀 더 니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ㅇㅇ 일병: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이 사랑을 토대로 스스로를 극복하자는 말에 충분히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말대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것이 결국 현실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이를테면 삶에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이 찾아오는 경우, 그 괴로움에 압도될 뿐이지 인생의 뼈저린 아픔마저 사랑할 용기는 더욱 생기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는, 고통은 '성장(극복)'에 대한 맥락에서만 납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주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는 데는 도움이 되는 관점이지만, 고통의 근본적 이유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듭니다. 맥락 없는 고통(이를테면, 갑작스러운 친족의 죽음)이 찾아오는 경우, 일반적으로 삶에 대한 비참함을 느끼지, 이에 대해 '다시 한번'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듯 보입니다. '목적'을 정하고 이를 이행하는 '성장'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충분히 '다시 한번'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생의 고통은 그보다 더욱 복합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저 또한 미래나 과거 같은 허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그저 현재가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는 주장엔 아주 깊이 동감합니다. 하지만 결국 글을 읽기 전 제가 가졌던 의문점은 해소되지 않아 찝찝한 기분입니다. 제가 피상적인 이해에 그쳐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답: <차라투스트라>는 니체가 후반기에 쓴 작품입니다. 니체는 심한 지병으로 고통받으면서, 사랑했던 여성에게 바람도 맞는 등 큰 고통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를 썼습니다.
당시 니체는 연인에게 버림받은 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정도의 큰 고통을 겪었으나, 훗날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과 보냈던 시간들은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회고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다시 한번!"은 단순히 견딜만한 고통이나 행복한 순간 등, 삶의 한 순간뿐 아니라 인생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 순간만은 절대 사랑할 수 없지만, 그만큼 다른 순간들을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삶으로서 삶의 행복한 순간들을 다시 누리기 위해 기꺼이 고통스러웠던 순간들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다시 한번!"이라고 생각합니다.
박ㅇㅇ 일병: 성심껏 답변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제가 니체의 사상을 이해한 바로는, 애초에 "'끝(해방)'이란 허상의 개념이며, 따라서 죽음, 미래 등 불필요한 관념에 의해 고통을 받을 필요 없이 그저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현재 겪는 이 고통'을 '미래나 과거에 있(었)을 행복한 순간'을 통해 합리화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포장해봤자, 결국 인간은 죽을 때까지 현재만을 경험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니체의 주장은 (고통까지 포함한) 인생 자체에 대한 사랑의 관점을 가지자는 것으로 보입니다. 운명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분명 니체의 말은 정신적으로 고양되기 충분하지만, 삶에서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다 보면, '고통의 근본적 이유'에 대해 상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통의 근본적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결국 삶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회의감이 들게 됩니다. 니체의 주장에 동의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주장을 이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당면한 괴로움을 이겨내서 극복한 사람이 됐다고 가정한다면, 그 사람은 과거의 고통을 이겨내고, 고통마저 사랑할 근거가 생기게 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 인생의 고통은 더욱 복합적이며, 때로는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겪을 당시의 나와, 고통이 끝나고 난 뒤의 나를 같다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당장의 괴로움이 없다면 한껏 긍정적인 사유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통마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고통을 겪을 당시의 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 확실히 너무 큰 고통을 겪으면서 그 고통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특히 고통이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성장을 위해 의미 있는 경우에만 극복하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친척분이 돌아가셨을 때, 제가 고통스러웠던 근본적인 이유는 돌아가신 분이 저와 친했던 친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근본적 이유를 없애려면, 저는 그 누구와도 가까운 관계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돌아가신 제 친척분과의 관계가 저에게 큰 고통을 안기는 이유가 되기는 했으나, 동시에 저에게 수많은 가르침과 즐거운, 행복한 추억을 주었고, 그 결과로 고통을 겪는 순간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고통을 포함한 인생을 사랑하는 것, 고통을 마주할 용기라는 것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 그 자체는 즐길 수 없지만, 그런 고통이 있는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 니체의 사상 아닐까요?
박ㅇㅇ 일병: 네. 확실히 고통 없는 행복은 없듯, 고통 또한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인생의 긍정적인 면을 사랑하기에, 부정적인 면조차 사랑할 수 있게 되며, 곧 삶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김ㅇㅇ 병장: "타인이 정한 도덕적 관념이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을 창조"
이 부분이 양날의 검이라 생각합니다.
타인이 정한 도덕적 관념이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을 만든다는 것은 다르게 보면 자기 자신만의 잣대를 만들어 자신만의 세상을 보는 거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의 잣대를 만들어 세상과 부딪히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양날의 검이라 생각했습니다.
"자기 자신만의 잣대를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내 말이 옳고 진리다." 이렇게 다른 사람까지 자신의 생각대로 행해져야 옳다는 지배자적인 생각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맞는데 다른 사람은 다른 도덕적 관념 등(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올바르게 바꾸려 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반하는 사람이 위버멘쉬처럼 행동하면, 자신을 바꾸려 하는 사람은 세상의 벽이고 그걸 넘어서려는 시련을 견디는 위버멘쉬라 생각하며 계속해서 세상과 싸우면서 자신을 위로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내 비판적인 생각을 올리는 게 옳다고 글을 올리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요약하면, 타인이 정한 도덕적 관념이나 기준애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을 창조하는 위버멘쉬라는 독불장군, 독재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답: 맞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나치 독일이 가장 사랑했던 철학자가 니체이기도 하고, 히틀러도 니체에 대해 극찬하였다고 합니다.
다만 이는 위버멘쉬를 잘못 이해하여 생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니체는 위버멘쉬가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을 창조"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파멸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끊임없이 비판하며, 의심하여야만 위버멘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의 인간이 아닌 위버멘쉬에 다다른 존재라 생각하고, 자신이 창조한 도덕관이 완벽하다고 믿는다면, 니체가 비판한 성직자들이나 기존의 도덕관에 사로잡힌 이들 이상으로 추악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박ㅇㅇ 상병: 이곳이 군대인가, 그럼 좋다. 다시 한번!
이ㅇㅇ 상병: 앞으로 오늘 하루만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반복되는 오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매 순간을 사랑해야 한다... 정말 멋진 말입니다.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 니체, <우상의 황혼>
군대에서 심적으로 방황하는 시간을 겪었습니다.
군대에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라기 보다는 제 삶과 스스로에 대한 무엇인지 모를 두려움과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읽게 된 도서의 한 문장이, 철학이라고는 치를 떨던 제게 니체를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니체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절 바꿔놓았고, 저를 가장 단기간에 바꿔놓은 스승님이 되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어려운 책을, 망설임 없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함께 읽어주고, 각자의 시각을 공유하며 소화해준 우리 부대 독서 동아리 회원님들께 감사합니다.
댓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공유해주시고, 저와 긴 이야기를 나누어 생각을 발전시켜주신 공군 전우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도 이 글을 통해, 니체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Blog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난을 마주한 개인은 어떻게 집단이 되는가 [알베르 카뮈 - 페스트] (0) | 2022.07.10 |
---|---|
학자가 된다는 것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리뷰] (0) | 2020.06.07 |
댓글
이 글 공유하기
다른 글
-
재난을 마주한 개인은 어떻게 집단이 되는가 [알베르 카뮈 - 페스트]
재난을 마주한 개인은 어떻게 집단이 되는가 [알베르 카뮈 - 페스트]
2022.07.10 -
학자가 된다는 것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리뷰]
학자가 된다는 것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리뷰]
2020.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