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ularity [2025년 계획]
특이점이 온다.
2024년 12월, 대학 졸업과 인턴 종료, 탄핵 정국, 경제 위기까지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미래에 단 하나 명확한 사실은 특이점이 온다는 것뿐이었다.
IMF 이후 최고 수준의 경제적, 지정학적 불확실성, 말 그대로 하루 단위로 발전하는 기술, 더 이상 학생이 아닌 성인으로서 고민해야 하는 것들까지 온 세상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숨이 막힐 듯한 혼란과 고민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생각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내 삶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지는 격동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란 점이었고, 이는 또 하나의 질문이 되어 내 사고를 마비시켰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어떤 선택지를 갖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에 대한 것도 모른 채, 사실상 사고가 정지한 상태로 3주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정말 운이 좋게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독백하듯 근황을 공유하며,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게 생각이 정리되어 마침내 정돈된 글의 형태로 내 계획을 적어나갈 수 있게 되어 일말의 안도감을 느낀다.
계획이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불확실성이 가득한 시기지만, 길을 헤매는 중에도 나까지 잃지 않고자, 지금 한순간 고요해진 마음을 이정표 삼아 미래를 살아보고자, 누군가 혼란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내 경험과 생각이 조금이나마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남긴다.
이번 글은 나를 혼란하게 했던 마음속 고민의 근원인 기술적 특이점에 대해 다루고, 내가 고민한 이유와 바라는 것을 단순화한 뒤, 이를 위한 실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형태로 써나가 보려고 한다.
기술적 특이점
특이점이 왔다. 레이 커즈와일의 저서처럼 가까운(near) 정도가 아니라, 이미 왔다.
2024년 9월, OpenAI o1을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o1은 전 세계 프로그래머들의 알고리즘 능력을 평가하는 코드포스 상위 11% 수준의 성능을 모델 스케일링이 아니라 추론 시점에서의 개선을 통해 이뤄냈다. 이는 AI의 약점으로 평가되는 높은 학습 비용과 학습 데이터 고갈로 인한 추론 성능 발전의 한계가 극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알고리즘 능력은 "문제 해결 능력"으로 볼 수 있다. 자연어로 주어진 문제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적절한 subproblem으로 분할하여, 올바른 해결 방법을 추론하고 이를 코드로 구현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기존에 우리가 기계에게 맡겨왔던 "기능"들과 차이가 있다.
연필은 기호를 남기고, 카메라는 사진을 찍으며, 컴퓨터는 계산을 한다. 이런 게 기능이다.
한편, 역할이란 여러 기능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지식들로부터 새로운 통찰을 도출해 적절하게 공유하는 것, 어떤 목적을 가진 SW를 개발하고, 개선하는 것. 이런 것들은 역할이다.
현대의 AI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이전에 학습하지 못한 유형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풀이를 만들어 해결할 수 있는가-는 AI 연구자 사이에서도 오랜 논쟁거리였다.
내 오랜 생각은, "가능할지도 모른다"였다. o1을 본 이후, 그 생각은 "가능하다"로 바뀌었다.
AI 발전이 생각보다 빠름을 깨닫고, 한동안은 연구자로서의 내 커리어를 고민했다. 대게 AI가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어떤 연구가 필요할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러던 12월, 구글이 이미지, 비디오, 오디오를 이해할 수 있으며 뛰어난 성능과 추론 속도를 보유한 Gemini 2.0을 발표했다. 발표 제목은 "Agentic AI 시대를 위한 새로운 모델"이었다. AI가 이미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임을 시사하는 제목이었다.
OpenAI o1의 한계는 높은 추론 비용이었다. AI가 고민을 오래 할수록 추론 성능이 증가하기 때문에, 높은 성능을 위해선 많은 시간과 비용(전력, 컴퓨팅 비용)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Gemini는 이를 자체 개발한 TPU(AI 연산용 처리 장치)와 최적화로 해결했다.
(이외에도, Gemini는 LLM의 한계로 지적되던 짧은 context window를 100만 토큰까지 확장했다.)
정리해 보자, OpenAI o1은 추론 단계에서 충분한 자원을 투입할 경우, AI가 인간 대부분보다 높은 지능을 보일 수 있음을 보였다. Gemini 2.0은 AI가 텍스트뿐 아니라 이미지와 비디오, 오디오를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역량과 추론 능력에도 불구하고 최적화를 통해 매우 높은 추론 효율을 가질 수 있음을 보였다.
이제, AI가 상위 10% 이상의 인간과 동등하거나 뛰어난 지능을 가질 수 있음은 자명해졌다. 환각 문제, long-context에서의 성능 하락 문제, 여전히 비싼 추론 비용 등 문제는 남아있지만, 이는 모두 공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미 특이점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ChatGPT가 등장한 지 1개월 정도가 지난 23년 1월 2일, 나는 대학 연구실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AI 연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쉼 없이 AI를 배웠고, GPT-4o가 공개되고 2개월이 지난 24년 7월, 네이버클라우드에 인턴으로 합류하여 HyperCLOVA X 비전 개발에 참여했다. 지난 2년, 그야말로 하얗게 불태우며 달려왔다.
그간 AI도 발전했다. AI에 처음 관심을 가진 2015년부터 분야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들어왔지만, 발전 속도는 점점 빨라지더니, 이윽고 내 인지를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
바로 어제, OpenAI는 o3 모델을 공개하며, 처음으로 AGI에 근접한 AI라 소개했다. o1 공개 3개월 만이었다.
커리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AI를 처음 접한 2015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컴퓨터 기술을 다루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생각 하나로 정석적인 길에서 벗어나 IT 특성화고 SW 개발과로 진학했고, AI를 다루기 위해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고3에 군 대체복무와 취업을 포기하고 정시에 도전하여 중학교 수학부터 수능 수학까지 독파하고 대학교에 진학했다.
전역하고 15일, 짧게 깎은 머리가 다 자라기도 전에 대학 연구실에 학부 연구생으로 들어가 온종일 공부에 매달린 것도, 학부 졸업 전부터 불확실한 취업 시장으로 스스로를 내던지며 ML 엔지니어가 되고자 한 것도 모두 이러한 꿈의 연장선-AI 기술로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지금, 내가 배워온 AI 기술 자체가 너무 빠르게 발전하여 내가 가는 방향이 의심스러운 지경이 되고야 말았다.
원래 계획은 수년간 실무 경험을 쌓고, 석사나 박사에 진학하여 연구 경험을 채워 실무와 연구 역량을 고루 갖춘 Research Engineer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흐른 후에, AI 기술로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주기에 Research Engineer가 적합한 목표일까?
나는 정말, Research Engineer라는 고정된 목표와 n년의 경력, 석사/박사의 학위만을 목표로 성장하기만 해도 되는 것인가?
나는 어떤 커리어를 쌓고, 어떤 목표를 이루고, 어떤 길을 가고 싶은 걸까?
경제적 목표
내 인생의 큰 마일스톤 중 하나는 4억의 현금을 모으는 것이다.
4억을 모아 안정적으로 자산을 운영한다면, 자본소득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생활과 자산 증식이 가능하다.
자본 소득이 소득의 핵심이 되면 직장에서 버는 돈의 양에 크게 집착할 필요가 없다. 돈은 노동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당장 직장에서 받는 노동소득은 4억을 모으는 내 목표에 적당한 수준이면 된다.
물론 빨리 달성할수록 좋긴 하지만, 제1의 목표가 돈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작금과 같이 불안한 경제 상황을 마주하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커리어 선택에 있어 돈에 매몰되지 않기로 했지만, 돈을 아예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까지 선택에 반영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다.
행복하고 건강한 삶
가장 중요한 목표이면서도, 가장 쉽게 경시하게 되는 목표다. 어려운 목표이기도 하다.
행복이란, 건강이란, 지금의 그것을 의미하는 걸까 혹은 가까운 미래의, 먼 미래의 그것을 이야기하는 걸까?
흔히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해선 안된다고 하지만,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이러한 선택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 미래와 현재의 가치 간에 트레이드오프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선을 기준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인가?
이 어려운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연초에 난데없이 실명의 두려움을 겪으며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었다.
미래는 결정적이지 않다. 적어도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한에는 그렇다.
당장 3년 뒤에 AI 혁명이 일어날지, 인류의 수명이 획기적으로 연장될지, 결국 세계대전이 일어나 우리 모두가 특이점의 코앞에서 원시시대로 회귀할지 모른다.
혹은 그 모든 일을 겪기 전에, 갑자기 내일 아침 눈을 뜨니 앞이 안보이거나, 귀가 들리지 않거나, 아예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미래를 예측하고, 이에 따라 현재에 누려야 마땅한 것을 유예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렇다고 현재에 누릴 수 있는 쾌락의 최대치를 행복의 한 형태로 오인하고 방자하게 사는 것도 어리석다.
나는 내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차근차근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것이 즐겁다. 그러나 이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친구를 만나고, 좋은 경험을 하고, 세상의 다양한 매력을 느끼는 것이 즐겁다. 그러나 이를 위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회포를 풀다 보니 한순간, 내가 바랬던 것들이 세 가지 요소-커리어, 경제적 요소, 행복-로 구분됨을 깨달았다.
동시에 인생의 1막, 학생으로서의 삶을 마무리하며 이 목표들이 잘 정합되지 않아 각자의 방향을 향하고 있던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커리어에 대한 확신을 잃었다. 여전히 세상에 AI로 좋은 영향력을 퍼뜨리고 싶어 하지만, 그 실천 방법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커리어에 대한 구체적 목표가 사라지니 경제적 문제가 떠올랐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커리어를 중심으로 한 미래 계획이 흔들리니 불안함이 엄습한 것이다.
이어서 결국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전역 후 그야말로 치열한 2년을 버티게 해 준 동력이 흔들렸다.
사람도 버전업이 필요하다.
한동안 내 여러 욕망을 하나로 묶어 끊임없는 도전과 성장을 가능케 한 것은 AI Engineer라는 커리어에 대한 확신이 근간에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AI를 배우면 AI Engineer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경제적 성공도, 행복도 따라올 것이란 확신이었다.
그러나 AI의 발전은 역설적이게도 AI Engineer의 성공이 경제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는 시대를 열었고, 갑자기 찾아온 안과 질환은 내가 망각하고 있던 내일의 리스크를 상기시켰다. 열심히 잠을 줄여가며 공부해도 커리어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고, 운이 나쁘면 어느 날 근본적인 건강과 행복이 무너질 수 있다.
이제 나는, 커리어가 아닌 나를 믿어야 한다.
AI 엔지니어로 성공하지 않아도, 구체적으로 어떤 학위를 얻고 어떤 회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내가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퍼뜨릴 수 있다는 믿음.
특정 커리어에서 성공하지 않아도, 국제 경제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도, 내가 적절히 견뎌낼 수 있으리란 믿음.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쳐도, 절망 속의 희망과 행복을 찾을 힘이 내게 있으리란 믿음이 필요하다.
특이점, 피할 수 없으면 써먹자
이미 한참 전부터 특이점이 오리라 믿고 기대하던 나지만, 막상 그 가능성이 눈앞에 도달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이제, 긍정적인 측면에 집중해보기로 하자.
내년부터는 삶의 모든 부분에 AI를 적용할 것이다.
- 업무와 의사 결정에 LLM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 투자, 일정 관리, 연구를 위한 각각의 Agent를 직접 설계해 사용해 볼 것이다.
- 그리고, AI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하나 시작해보려고 한다.
AI로 인한 격동의 시기, 두렵다면 두렵지만 즐겁기도 하다. 앞으로 2년 뒤, 4년뒤, 10년 뒤는 어떤 모습일까?
초지능과의 조우, AI 친구와의 인연,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또 어떤 상상할 수 없는 미래가 기다릴까?
당장 건강하고, 행복하자.
매 순간을 귀하게 여기자. 매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하루하루를 바르게 살자.
항상 멋진 연구자, 멋진 인간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는 이들을 본받자.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8시간 규칙적으로 수면하자.
- 과도한 멀티 태스킹을 경계하고, 효율적으로 일하고, 푹 쉬자.
- 후회하지 않을 좋은 선택을 내리자.
크고 작은 일에서 세상을 위하고, 보람을 찾자.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퍼뜨리는 것을 내 사명으로 여기고 살아왔지만, 정작 이를 너무 커리어에 한정해 생각했다는 반성을 금할 수 없다. 커리어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넓은 범위에서, 작더라도 의미 있는 기여를 하며 살자.
다양한 것을 배우고, 그런 나를 믿자.
올해에도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이지만, 더 잘해보자. 취미로 시작한 커피와 드럼을 잘 지켜나가면서, 오랜 기간 쉬어 느슨해진 영어와 운동도 다시 배워야지.
항상 가장 좋은 선택지를 고르고, 최선을 다하고, 그런 나를 믿자.
시대가 어떻게 변해도 그런 자세가 변치 않는다면, 그런대로 좋은 삶일 테니.
이렇게 인생의 약 1/4, 학생으로서의 끝자락, 인생 1막의 끝에서의 회고와 계획을 마치려고 한다.
특이점 얘기만 한참 한 것에 비해, 단순하고 식상한 계획에 김이 센 분들도 있을 것 같다.
결국 삶이란 그런 것이지 싶다.
내 멋대로 정의한 인생 1막 마지막 회고를 준비하며, 마침 급변하는 세상에 대한 나름의 통찰도 고민하며, 정말 긴 시간 고민하고 생각한 결론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식상할 정도로 정직하게 고난과 불합리 속에서도 행복을 추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우리는 결국 찰나의 현재를 사는 인간이라는 명료한 진리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매 순간 행복하고 재밌게 살아보자.
조금 미리,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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