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1/3 회고] 군대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2021년 3월 15일.
입대한 나를 가장 먼저 놀라게 한 것은 공군 교육사령부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내가 머물었던 신병 4대대의 낡은 건물 창밖에는 훈련 기간 내내 분홍빛 벚꽃이 액자 속 그림처럼 피어있었다.
훈련에 지쳐 무너질 것 같을 때, 외로움과 그리움에 미칠 것 같을 때도 생활관에만 복귀하면 아름답게 피어있던 벚꽃은 때로는 날 위로해 주는 것 같기도하고, 때로는 날 비웃는 것 같기도해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2021년 9월 18일.
생활관 주변에 떨어진 낙엽을 쓸고있자니 문득 교육사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훈련소에서의 5주는 영원같이 느껴졌는데 어느덧 계절이 두번이나 바뀌고 나는 일병 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일까, 이제는 부대안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봤을 때 비참하거나 우울하기보단 그저 그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군대에 오기 전에는 막연히 훈련에 대한 걱정이나 자대에 대한 걱정이 컸다.
훈련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면 어떡할지, 자대에 가서 부조리를 당하면 어떡할지 등이 주된 걱정거리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군생활을 해보니 훈련은 힘들었지만 보람차게 잘 이겨낼 수 있었고, 자대도 잘 골라 온덕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잘 적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살아가는 것이었다.
번아웃
자대에 오고 첫 1개월은 훈련소나 특기학교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업무를 배우다보니 첫 휴가를 다녀왔고, 어느덧 자대에 적응하고 일병 계급장을 달았다.
마침내 자대 생활에 적응하고나니, 비로소 앞을 볼 수 있었다.
남은 군생활이 500일이었다. 아찔했다.
그 많은 훈련과 적응을 거쳐 이제 군생활을 100일 했는데, 이걸 다섯 번이나 더 하라니.
훈련소에서 빨간 모자를 쓴 조교의 호통과 비바람 속에서의 얼차려에도 무너지지 않던 내 멘탈은 세 자리 숫자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워서, 나는 내게 번아웃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아무것도 할 의욕이 나지 않았고, 모든 게 짜증스러운 나른하고 괴로운 시간이란 생각만이 들었다.
때때로 친한 선임이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냐며 걱정했줬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나는 내가 번아웃이 온 줄도, 표정이 안 좋은 줄도 몰랐다. 그저 군생활이 계속 이런 느낌이라면 정말 끔찍하리란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갈등, 돌아보기
그렇게 살던 중,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타 부서의 모 병사와 시비가 붙은 것이다.
자세한 경위는 밝히기 조심스럽지만, 나름 억울하고 분해서 만 하루를 앓았다.
밤 세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번아웃이었다는 걸 느꼈고, 심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단 걸 깨달았다.
더불어 나를 걱정하고 변호해준 수많은 사람들을 돌아보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회복, 다시 일어서기
진정한 친구는 힘든 순간에 보인다 했던가.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고 보니 날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아껴주는 친구들이 보였다.
솔직히 내가 겪은 갈등이나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 이 나라 어느 곳에는 나보다 힘든 군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내 별것아닌 고민과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고 행복했다.
ㅇㅇ팀 백지오 일병입니다!
군대에서는 전화를 받을 때 소속과 이름을 밝힌다.
병사는 물론, 부사관과 장교도 예외는 없다.
공군 검색창에 이름을 입력하면 해당 인물의 정보가 나오는데, 내 이름이 워낙 특이해서 백지까지만 쳐도 나밖에 안나온다. (흔한 이름의 경우, 장성급부터 훈련병까지 수십명이 나온다.)
오랜만에 인터넷에 내 이름을 검색해봤다.
공군 검색창에서 나오는 백지오와는 사못 다른 백지오가 나왔다.
딥러닝을 좋아하고,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고작 몇개월 전이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같은 나였다.
우습게도 나는 나보다 어린 나에게 동기부여를 받았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그 후로 많은 일이 있었다.
좋은 일, 나쁜 일, 그저 그런 일도 있었고 때로는 다시 무너질 것만도 같았지만 견뎌냈다.
여러 대회에 나가서 어떤 대회는 떨어졌고, 어떤 대회는 붙었다.
부대 내에서 나름 지식 공유 활동도 하고, 논문도 많이에 읽었다.
이렇게 살다보니 누군가는 독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대단하다 하고, 누군가는 고맙다고 한다.
그렇게 살며 낙엽을 쓸다보니 문득, 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예쁘게 느껴져서, "아, 이런 맛에 살았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대에 온지 4개월만에, 내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필승! ㅇㅇ팀 백지오 일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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