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나의 전부였던, 그 곳으로 [다시, 공군 체계단 1편]
12월 들어 처음으로, 엄청난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낙엽을 다 벗어내고 앙상한 가지들을 드러낸 나무들과 붉은 벽돌 건물들, 사방을 마치 성벽처럼 에워싼 산세가 전시의 요새를 연상캐하던 개룡대는, 하룻밤만에 쌓인 눈이 반사한 햇빛을 튕겨내며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다.
출신지도, 성격도 다른 7명의 룸메이트와 부대껴 매일 밤 누군가의 코골이와 이가는 소리에 깨는 것도.
통화 한 번 맘 편히 하자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건물 뒤 창고 사이에 숨어들어가 벌벌 떠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모든 걸 뒤로하고 윤형 철조망과 전기 울타리, CCTV로 둘러쌓인 요새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도.
이걸로 끝이다.
외출 때마다 빠른 걸음이 절로 나왔던 부대 도로도.
창고 처마 밑에 서있으면 항상 다가와 다리에 뺨을 비비던 고양이도.
박 중위님, 내 후임 이 병장이 옆에 있는 내 자리도.

안녕, 백 병장

3년이 지나고 찾은 계룡대는, 바닥에 소복히 쌓인 은행잎과 아직 떨어지지 않은 은행잎, 그리고 몇 그루 상록수들이 섞여서, 3년 전 그날과 약간 다른 색, 다른 소리로, 하지만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나랑 친했던 간부님들이 아직 계실까?
내가 남겨놓은 것들은 잘 있으려나?
두근거림을 안고 대기실에 앉아있으니, 마치 면회를 기다리는 부모님이나 연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 열린 문에서 나를 부대 안으로 안내해 줄 사람이 언제 올지 바라보며 기다리는 심정이란.
잠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처음 뵙는 간부 한 분이 내게 이름을 물었다. 나를 찾아오신 게 맞았다.
이제 정말 들어가는구나. 다시는 못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그곳으로.

정말 우연하고, 충동적인 일이었다.
추석 연휴가 거의 끝나가던 10월 어느 날, 문득 옛 친구들이 그리워져 "서로 연락 좀 하고 지내자"는 생각으로 만든 커뮤니티에, 24시간만에 100명이 넘는 사람이 들어오고, 그들이 또 주변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렇게 공군 정보체계관리단 전역자 커뮤니티, <체계단 Alumni>가 탄생했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의 이름, 그러나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한 목소리.
입에서 무심코 군대에서 부르던 호칭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그걸 듣고 같이 웃고, 어떻게 지냈는지, 그때 그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으며, 우리는 밤이 깊어지도록 떠들었다.
이렇게 모였으니 우리, 전처럼 컨퍼런스도 열어보자. 해커톤도 하고, 좋은 기회가 있으면 공유하기도 하고.
아예 원하는 사람들끼리 창업을 해도 되겠다. 우리가 뭉치면 무적이다.
여러 아이디어와 반가움이 교차하던 중에, 우연히 우리가 있었던 부대에 찾아가 간단한 발표를 할 기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 회사에는 휴가 내고 군대에 발표하러 가는 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계룡대로 향하는 새벽 열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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