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SW 개발병 전역] 안녕. 고마웠어. 백 병장.
2020년 6월, 전문연구요원과 산업기능요원, 군 입대의 기로에서 시작된 군대에 간 공돌이 시리즈를 전역 후 어느덧 1개월이 넘게 지난 지금 마무리합니다.
제 부족한 글 솜씨에도 불구하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들과, 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군대라는 조직과 내가 부딫히기 시작한 것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성화 고등학교를 다니며 운 좋게 산업기능요원으로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나, 유난히 춥고 힘들었던 2018년 1월, 나는 군대에 가더라도 대학교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취직과 대체 복무를 포기하고 남들 다 입시 준비하는 고등학교 2년간 코딩만 해왔던 나는 그야말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입시생의 삶으로 뛰어들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수능이라는 거대한 도전 앞에서 군대라는 문제는 내게 크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2019년, 불과 1년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대학교 생활을 즐기며, 새내기 생활을 즐기면 즐길수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 모든 것을 놓고 가야만 할 것 같은 군대는 나에게 큰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다가왔다.
급기야 동기들이 한 명 두 명 입대하기 시작한 2020년에 들어서는 군대라는 얘기만 들어도 숨이 턱턱 막히고 속이 쓰려올 지경에 이르렀다.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산업기능요원이나 전문연구요원은 너무나도 그 문턱이 높았고, 하고 싶다고, 할 능력이 있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하루 고민과 근심에 차 있던 어느 날, 글로 내 생각과 계획을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탄생한 글이 <나는 군대에 가기로 했다.> 이다.
군대에 가기로 하고
막상 군대에 가겠다는 결심이 서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갈 거, 최대한 준비해서 가면 군대에서도 최대한 덜 손해 보고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군대에서 다치거나 죽지 않고, 내 인성이 퇴보하지 않고, 내가 가진 지식들이 빛바래고 뒤처지지 않을 방법을 찾았다.
인터넷과 지인 찬스 등을 활용하며 군대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군대에 먼저 간 지인들 말로는, 좋은 부대에 가면 충분히 개인 공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희망이 보였다.
3개월 긴 군생활에도 불구하고 주변 지인들이 다들 공군을 추천하기도 했고, 자대를 내 훈련소 성적에 따라 골라서 갈 수 있다는 점이 2년 내내 불확실성 속에서 고통받아 온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공군 정보체계관리단으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나는 어느새 훈련소와 특기학교를 거쳐 공군 정보체계관리단에 가게 되었다.
특기학교에서 만난 장교분들의 추천에 선택한 정보체계관리단에 도착하던 순간까지도, 내가 잘 선택한 것인지 두려움이 들었다.
다시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나름의 힘든 일과 즐거운 일들이 있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좋은 사람들만 만난 것은 아니었다.
정신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적응하다 보니, 군 생활의 3할이 끝나 있었다.
군대에서도 시간은 흐르더라.
백 일병이기 전에, 백지오
군 생활 초반이 정신없이 지나간 것을 보니 기쁘기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어느새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했고, 공부하는 감각도 즐거움도 다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분명 1년 전까지만 해도 더 많은 지식을 추구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곧잘 어울리는 대학생이었는데, 한순간에 현실에 안주하는 늙은이가 된 것만 같았다.
한동안 방황하다가, 오래 잊고 있었던 내 블로그의 회고와 계획글들을 보았다.
불의에 타협하지 말고, 내 초심과 목표를 잊지 말고, 항상 더 나은 사람을 그리자.
군대가 날 더 못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스스로 자랑스러운 군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
- 군입대, 재정비의 해 [2021년 계획]
글 속의 나는 큰 목표를 향해 열정을 갖고 나아가고 있었다.
글을 읽으며 과거의 나 자신을 몇 번 마주하고 나니, 잃어버렸던 내 이름을 찾은 기분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치히로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군생활
부대 생활을 선도하는 자율위원이 되었다.
동아리도 하나 이끌게 되었고, 연휴면 뜻 맞는 사람들을 찾아 지식을 나누는 콘퍼런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교양이라면 치를 떨던 내가, 철학책을 펼쳐 들고 독서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일과가 끝나면 틈틈이 창업이나 해커톤 등에 도전했다.
어떤 도전들은 결과가 좋았고, 어떤 도전들은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어느 도전 하나 배운 점이 없는 무의미한 도전이 없었다.
이런 도전을 함께하고, 응원해 주고, 혹은 내가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대에 많았던 것은 행운이었다.
전역 준비
어느덧 군 생활의 끝이 다가왔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전역이 100일 정도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순간이 오면 기쁘고 전역이 마냥 기다려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쉽고 걱정이 앞섰다.
나는 군대에서 가장 많이 성장하였고, 넘치는 인복 덕에 소중한 인연도 많이 만들었다.
군대에 오기 전에는 군대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잃고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웠는데, 이제는 전역 후에 내가 군대에서 성취한 만큼 해낼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문득 입대를 결심하고 준비하던 날들이 떠올랐고,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전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을 그리며
전역하고 나는 어떤 삶을 살까? 어떤 삶을 살면 좋을까?
1년 휴학하고 모은 돈으로 세계를 여행하며 보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볼까?
아니면, 소프트웨어 마에스트로에 도전해서 항상 꿈에 그려왔던 창업에 본격적으로 도전해 볼까?
다른 이들한테 내 지식을 나누고 알려주는 유튜브나 강사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많은 고민들이 머리를 스쳤다.
나와 가까운 친구들은 처음에는 내 야심 찬 계획을 귀 기울여 들어주다가, 나중에는 목표 좀 그만 바꾸라고 놀렸다.
전역 전 마지막 휴가를 앞두고, 나는 다시금 최근 몇 년의 여정을 돌아봤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다가 게임이 좋아서 소프트웨어과가 있는 동네 특성화고에 진학하고,
흘러가는 데로 적당히 먹고 살 정도로 하며 살다가 갑자기 1년 만에 수능에 도전하고,
대학교에서 만난 멋진 선배들과 교수님들을 보며 공부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고,
하루조차 가고 싶지 않았던 군대에서 21개월을 함께 하고도 헤어지기 아쉬운 인연과 경험들을 쌓았다.
그러고 나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막연히 어렵고 두려워서 묻어두고 있던 꿈이 떠올랐다.
나는 내 것을 만들고 싶다.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첨단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계단의 한 칸에라도 내 이름을 세기고 싶다.
SNS나 테크 뉴스에서 접하는 "최신 정보"가 아니라, 내가 알아내고 기여한,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된 "최신 정보"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나누고 싶다.
어디서 들은 걸로 적당히 아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자부심을 갖고 안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원한다.
안녕, 공군. 안녕, 체계단.
남들은 다들 전역 2주일 전이면 시간이 멈춘다 하던데, 나는 전역 준비 하느라 바빠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전역 전 마지막 일요일, 전역 후 연구자로 발돋움하기 위한 <백 병장의 CV 부수기> 시리즈 마지막 편을 업로드하고, 부대원들 몇 명과 노래방에 다녀왔다. 전역 전날에는 소중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이윽고 전역의 날이 밝자, 세상은 간밤에 내린 눈으로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감사하게도 후임들이 챙겨준 롤링페이퍼와 전역장을 들고, 미처 택배로 붙이지 못한 짐들을 주렁주렁 싸들고 부대를 나섰다.
휴가 때는 조금이라도 집에 일찍 가려고 해 뜨기도 전에 뛰쳐나와서 지나치던 길인데, 발걸음이 어찌 그리 무겁던지.
군대에 다녀와 보니
군대를 떠나 어느덧 1개월 하고 보름 정도가 지났다.
군대에서는 그렇게 시간이 안 갈 수가 없었는데, 전역하니 시간이 쏜살같다.
나는 전역하고 17일 정도 집에서 쉰 뒤에, 학교에서 진행하는 학부 연구생 인턴(URP)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갑자기 정한 것은 아니고, 전역 전 마지막 휴가 때 교수님께 이메일로 사정을 설명드리고 서류 지원을 비롯한 절차를 진행하여 전역하고 바로 23년 겨울학기 URP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상태였다.
전역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고된 연구생 생활이라니, 주변 지인들의 장난 섞인 우려가 많았다.
심지어 교수님께서도 좀 놀고 쉬다가 학교로 돌아오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권하실 정도였다.
나로서도 1년 정도 휴학하며 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이게 맞나 고민도 되었다.
그러나 군대에 가기로 결심하고 준비하고 다녀오는 과정에서 어떤 상황을 접할 때 가장 힘든 시기는 상황이 닥치기 전임을 깨닫기도 했고, 준비가 갖춰진 상황에서라면 오히려 즐거운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알았기에,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고마워. 수고했어. 백 병장.
그렇게 연구실에 다닌 지도 4주가 지났다.
어느새 군대에서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백지오 병장이란 호칭보다도 지오씨나 지오님 같은 호칭이 익숙해졌다.
연구실에 처음 나가기 전날, 잠이 오지 않았다.
복습을 조금 하긴 했지만 2년이나 학교에서 멀어져 있던 내가, 군대라는 특이한 조직에 있다 온 내가,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금방 나는 내 새로운 호칭과 일상에 적응했다.
새로운 삶은 예상 이상으로 즐겁고 보람찼고, 행복했다.
연구실에 가기로 결심하고 준비했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군대에서 준비한 것들이 연구실 적응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군대에서 배운 리눅스를 비롯한 잡다한 기술들, 군대에서 도전한 해커톤에서 배운 git 등, 마치 군대에서의 경험들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너무나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모두가 군대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감사한다.
군대에서 내게 힘이 되어주고 가르침이 되어준 모든 사람들과,
지금까지 삶의 이정표가 되어준 선배들,
그리고, 흘러가던 데로 살아가던 인생에 방향을 잡고, 달려와준 백지오 병장에게.
전역 축하해.
군대에 간 공돌이.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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