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군대에 가기로 했다. [군대와 전문연구요원 사이에서]
군대에 가야겠다.
그렇다. 나는 군대에 가기로 했다. 이 글은 열린 결말이나 희망찬 결과 따위가 아닌, 우울하지만 최선이라 생각하는 결과까지 내 생각이 수렴한 과정을 쓴 글이다.
물론 모든 진로 결정은 사바사, 케바케이기 때문에 내가 내린 결정이 보편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학생들을 군대에 보내기 위해 부모님들이 내 글을 인용하여 자식 설득에 나서실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이라면 그랬을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힘내시라.
이 글에서 대학원 진학이란, 석사 혹은 박사 과정 중에 전문연구요원 제도(통칭 전문연)를 이용한 병역 이행을 얘기하는 것이다.
전문연구요원 제도란, 국내 이공계 인재 양성을 위해, 이공계 학사 학위 소지자나 박사 과정 학생이 중소기업 근무나 연구실 근무를 통해 병역을 대체하도록 해주는 제도이다.
이 제도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줄이겠다.
내가 대부분이 군대에 가는 1학년 직후에 군대에 가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 딥러닝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군대에 가서 내 뇌를 초기화하고 싶지 않았다.
- 후배들이랑 놀고 싶었다.
- 올해 졸업할 나랑 친한 4학년 선배들이랑 더 놀고 싶었다.
- 뭔가 버티다 보면 병역을 회피할 방법이 생길 줄 알았다.
- 그냥 군대에 가기 싫다.
나열해 놓고 보니 놀고 싶어서 안 간 것 같기도 하지만 기분 탓이다.
아무튼 나는 원래 2학년까지 놀고 군대에 가려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내가 2학년이 되는 2020년 1월에 역사에 길이 남을 생물학적 재앙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했듯, 나도 2월까지는 이 사태가 금방 잦아들고, 중간고사가 끝날 때면 학교 앞 술집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농담거리로 소비할 수 있는 해프닝으로 그칠 줄 알았다.
그렇기에 나는 올해 초에 너도 얼른 군대나 다녀오라는 가족과 친구의 설득을 만류하고, 여유롭게 코로나 정보 제공 사이트 개발에도 참여하고, 카페에서 공부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국내 확진자가 약 50명을 넘은 이후로는 안 다녔다.)
회피
보통 사람들은 충격적이거나 과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놓이면 상황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스트레스의 원인으로부터 날 논리적으로 격리시키는 방어기제가 조금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이번 학기에 학교에 나가서 후배도 보고 친구들이랑 놀기엔 글렀다는 사실을 마주하면 나는 논리적으로 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합리화를 하면서도, 군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
또한, 내가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좋은 보직의 모집공고가 아직 나오지 않아서, 충분히 전문연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등의 이유로 포장한다.
딱 개강 2주쯤 전이었다. "그 종교"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해서, 광역시 하나가 마비가 되었단다.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학교 개강은 점점 미뤄진다.
이제 원래 가려고 했던 2021년에 군대에 가기 싫어진다. 너무 억울하다. 코로나 때문에 놀지도 못했는데 왜 군대에 끌려가서 1년 6개월간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합리화
회피로 사태를 외면하기 힘든 정도가 되면 다음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합리화다.
이는 코로나 신규 확진 추세가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듯하다가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한 5월 즈음이었다.
이제 정신이 아득해진다. 내가 집에서 빈둥대고 있는 이유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구국적 결단이며, 동시에 대학원으로 가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다.
어차피 군대는 카이스트, DGIST, UNIST를 비롯한 국가 과학기술원 계열의 대학원에 박사로 진학하면 해결된다. 난 어차피 공부를 열심히 할 계획이고, 열심히 해서 과학기술원급의 명문 대학원에 진학하면 좋은 것이니 이건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자라난다.
어떻게든 내가 그리던 핑크빛 2학년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고, 빨리 군대에나 다녀오는 게 상책이라는 사실을 회피하려고 한다.
현실
한참을 방어 기제에 휩싸여 문제로부터 도망쳐봐도, 결국 언젠가 사람은 문제와 직면해야 할 때가 온다.
나에게는 며칠 전에 그 순간이 왔다. 어느 순간 내 가치가 군대라는 불확실성에 의해 상당히 제한됨을 깨달았다.
유명한 축구선수 손흥민 선수가 군면제를 확정받은 이후 몸값이 배로 뛰었다고 한다. 미필이라는 딱지는 그가 언제든 1년 반 동안 잠수를 타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투자위험성을 의미한다. 이건 굳이 국가대표급 체육 선수가 아니라도 동일하다.
그렇기에 나를 고용하거나 나와 무언가 해보고자 하는 사람은 보장을 원한다. 내가 군필이거나, 적어도 본인과 함께 무언가 프로젝트를 하는 도중에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보장이다. 이 보장이 없으면 내 능력에 관계없이 나는 투자 위험도 최상급의 상품이 되어버린다.
어떤 의사 결정에 있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내가 선호하는 방법은 기댓값 계산이다. 기댓값은 아래 공식으로 구해볼 수 있다.
(전문연에 성공할 확률) $\times$ (전문연에 성공하면 절약 가능한 시간) - (전문연에 실패할 확률) $\times$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가는 리스크)
만약 석사를 마치고 국내 최상위권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할 경우, 나는 석사를 마친 후 약 25살에 군대에 다녀와야 한다. IT 업계에서 석사 수준의 인재가 2년간 연구를 멈춘다는 것은, 경력 단절을 넘어 경력 박살이다.
물론 내가 전문연에 성공할 확률이 아주 높다면, 리스크 따윈 아무래도 좋다. 전문연에 실패할 확률을 곱하는 순간 리스크는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KAIST를 비롯한 과학기술원급의 대학원에 박사로 진학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하물며 AI를 비롯한 IT 분야로 유입되는 학생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점이다. 과학기술원급 대학원에 TO가 나더라도, 내가 지원 가능한 자리는 내가 원하는 분야의 연구소가 아닐 확률이 높다.
그때가 되면, 나는 분명히 높은 확률로 군면제를 받기 위한 대학원 진학과 내가 연구하고 싶은 분야로의 진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일 것이다.
물론 운이 좋다면 내가 원하는 분야의 연구를 하며, 군면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또 문제다.
석사를 마친 후에야 확인할 수 있는 불확실성에 인한 지속적 정신적 고통을 학사 2년 + 석사 2년 동안 받아야 한다. 스트레스는 공부 능률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라, 아마 나는 4년간 군대 문제로 고통받으며 연구에 온전히 집중하지도 못 할 것이다.
선택
내가 마주한 선택에는 일장일단이 있었다.
군대에 빨리 다녀오는 것은 내가 앞으로 최소 수년은 지고 가야 할 내 투자위험성을 하나 덜어주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쓸데없이 2년을 낭비한 결과가 될 수도 있고, 석사 후에 가는 것보다야 덜할지언정 경력 단절이 있긴 할 것이다.
전문연에 도전해보는 것은 내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공한다면 나는 비약적인 성장과 군필 타이틀, 과학기술원 학위까지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그 결과는 경력단절, 아니 박살이다.
몇몇 분들은 당연히 전자가 훨씬 안전한 것 아니냐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지금 군대에 간다는 것은, 지난 수년간 쌓아온 인맥과 친분을 반강제적으로 정리하게 된다는 것이고, 내가 어제 읽고 설레었던 논문의 내용을 잊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며, 2년 뒤에 나를 두고 앞서간 세상과 마주하겠다는 결심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누군가는 인맥과 친분이, 누군가는 기술의 발전이, 누군가는 변화하는 세상이 아쉬울 것이다. 누군가는 이 모두를 합쳐도 참을만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이들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안타까울 수도 있다.
또한, 아무리 겸손한 사람이라도 본인의 생명수당을 포함한 임금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임금은 사람의 자존감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정신과에서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빠른 복직이나 구직을 권하기도 할 정도다. 본인이 월 n만원의 임금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굉장히 힘이 나고 자신감이 생기는 일이다. 반대의 경우도 똑같다. 내 목숨 값이 100만 원이 안된다는 게 달가울 사람은 없다.
결론
여러분이 필자처럼 군대와 다른 무언가를 저울질할 일이 생긴다면 꼭 아래 리스트를 고려해보기 바란다.
- 병역 대체 제도는 선정했는가? (산업기능요원, 전문연구요원 등)
- 해당 제도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군대 1년 반 가기 싫어서 산업체/대학원 3년이 올바른 선택일까?)
- 해당 제도에 선정될 가능성이 충분한가? (내 학점/스펙이 적절하고, 내가 원하는 산업체 등에 자리가 있는가?)
- 정말 그게 나을까? (정말 짧다고 군대가 더 나을까? 원치 않는 분야의 대학원이라도 사회에 있는 게 나을까?)
나의 경우는 아래와 같았다.
- 산업기능요원은 너무 길고, AI 분야 회사가 잘 없다. 전문연은 괜찮을 듯?
- 어차피 대학원을 갈 거라서 전문연이 좋을 것 같다.
- 내가 원하는 연구실에 TO가 없을 확률이 매우 높고, 내 학점이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 미필이라는 불확실성을 안고 석사과정을 하기엔 내 멘탈이 너무 약하다.
결국 나는 군대에 가기로 했다.
내가 미필이라는 리스크를 안고 가기엔 멘탈이 약했고, 내 투자가치에 많이 악영향을 주었으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군대에 안 가면 나중에 전문연과 전공 중 하나를 양자택일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물론 순순히 갈 생각은 없다. 꿀보직을 받기 위해 최대한 조사하고, 악착같이 최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침에 결심이 서자마자 먼저 군대에 간 친구에게 전화하여 아래 표를 작성했다.
군대에 간 친구가 좋은 점은, 아침 8시에 전화해도 받는다는 것이다. 나쁜 점은, 새벽 4시에는 안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부대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의외로 사지방에서 논문 출력과 전공서적 주문이 가능할 거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아마 내가 사지방이 없는 최전방 부대 등으로 발령이 나지 않는 한, 나는 최소한의 공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행정병으로서 수많은 보직의 병사들을 만나며 썰을 들어온 친구로부터 다양한 숨겨진 꿀보직들도 추천받았다. 피곤하다는 친구를 갈궈가며 사지방에서 접속 가능한 개발 관련 사이트들도 확인해뒀다.
가능하면 군대 안에서 더 성장하여 나오고 싶지만, 일단 적어도 퇴보하지는 않는 게 목표다. 군대에서 공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벌써부터 포기할 바에 나는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
공익 근무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분도 있는데,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며 공부를 해선 안된다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이참에 군대에서 학점도 좀 올리고, 논문도 읽어서 전역하자마자 떡상을 노려보겠다.
군대에서 공부하는 내용을 연재할 시리즈도 기대하시라. 올해 연말 ~ 내년 초 중에 시작할 예정이다!
오늘도 군대에서, 군대 밖에서 국방의 의무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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