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성 문제: 2025를 보내고, 2026을 시작하며
문득 내 어린 시절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녹화해 둔 동영상처럼 선명한 1,2년 전, 인상적인 한 순간이 필름처럼 남아있는 5,6년 전을 넘어, 곁에 있던 친구의 얼굴이 가물가물하고 색 바랜 감정만이 떠오르는 먼 과거,
어렴풋이 우울했던 것 같기도하고, 또 때로는 유복했던 것 같기도 한 시절, 그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호기심에 오랜만에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찾아 열어봤다.
앳된 얼굴에 큼지막한 안경을 쓴 꼬마, 그 옆에 어릴 적 살던 집의 주소를 시작으로, 쭈욱 적혀있는 내 과거의 기록들.
적극성이 다소 부족함
온순하고 명랑한 심성을 지녀...
발표하기 등 기본 학습 기능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
지금의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낯선 누군가에 대한 설명, '이거 나 맞나?' 싶은 서술 사이에, 한 문단이 눈에 띄었다.

아, 너도 그랬구나.
비읍 받침이면 이십대 후반이야
이제 한국 나이로 스물 일곱이 되었다. 누가 그러더라, 나이에 받침이 시옷이면 중반, 비읍이면 후반이라고.
그래, 난 이제 이십대 후반이 된 것이다.
이십 대 초반-즉, 스무 살부터 스물두 살까지-에는 설레었던 기억이 많다.
계획에 없던 대학생활, 첫 연애, 생각보다 즐거웠던 군생활..
뭘 해도 처음인 것들이 많았고, 나는 그것들을 꽤 잘하는 편이었다.
나에 대한 자신감보다는 불안감이 컸지만, 스스로도 체감될 만큼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는 시기였기에 마냥 즐거웠다.
이십 대 중반-2022년부터 25년까지-은 꿈이 이뤄지는 시기였던 것 같다.
공부와는 담쌓고 살았던 내가 대학 연구실에 들어가고, 나름의 인정을 받았고, 좋은 친구들과 선배들, 스승님들을 많이 만났다.
중학생 시절 꿈꿨던 네이버에서 인턴을 하고, 대학 생활의 목표였던 국제 학회에서 AI 논문 발표를 했다.
그리고, 이름은 달라졌을지언정 초등학교 때부터 꿈꿨던 AI Engineer로서 취업을 해냈다.
직무의 범위가 모호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프로그래머와 과학자의 꿈을 모두 이뤘다고 할만할 것이다.
사실상 이제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시절까지 꿈꾸었던 것 중에 근처에도 못 가본 건 하나도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십 대 중반까지 25년 조금 넘는 시간을 살면서, 궁금했던 것 다 한 번씩은 해봤다.
이게 자랑스럽지 않다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기만이겠지.
그럼에도, 마냥 개운하지는 않더라
AI Engineer로 일한 지 어언 10개월, 사실 인턴 기간을 포함하면 그보다 더 길고, 애초에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일찍 컴퓨터공학이라는 영역에 발을 들인 만큼, 내게는 조금 특별한 양가감정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고1을 기준으로 10년, 딥러닝을 공부하기 시작한 대학교 때부터 하면 7년을 공부하였으니 스스로의 전문성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가 있었고,
동시에 커리어를 따지면 아직 채 1년도 차 되지 않은 신입, 사실 그조차도 재작년까지는 제대로 정규직 업무를 맡아본 적도 없었기에 검증되지 않은 채 시간만 쓴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었다.
작년 2월, 처음으로 정규직 AI Engineer로 취직하여 일하는 사이, 이런 불안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내가 배우고 갈고닦은 것들이 실제 세상에서도 통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간, 즐거운 시간이었다.
내가 만든 AI 모델이 기존 모델보다 좋은 성능을 보였고,
내가 배포한 코드가 효율적으로 대규모 응답을 처리했으며,
내가 만든 서비스가 수익을 창출하고, 좋은 평을 받았다.
종종 어려운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풀 수 없는 문제는 없었다.
그럼에도, 마냥 개운하지는 않더라.
줄곧 목표했던 것들은 분명 뒤에 있는데,
앞 길은 여전히 불투명한 그대로였다.
"이전에 낸 논문이 내 마지막 논문은 아니었을까?"
"앞으로도 계속 팀에 이만한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너무 일이 잘 풀려왔던 거 아닐까?"
일단 풀 수 있으면, 확장가능성의 문제죠.
어디선가 들은 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떠올린 말 같기도 하고.
아무튼 한 명의 공학인으로서 마음에 깊이 품고 있는 믿음이 하나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문제가 있는데, "가능한가?"와 "얼마나 확장가능한가?"의 문제다.
예컨대, '우리가 원하는 색을 내는 디스플레이를 만들 수 있는가?"는 "가능한가?"의 문제다.
이는 20세기 초반에 컬러 디스플레이가 발명되어 "가능하다"라고 밝혀졌다.
"우리가 원하는 색을 내는 디스플레이를 얼마나 작게, 혹은 크게 만들 수 있는가?"는 "얼마나 확장가능한가?"의 문제다.
이 문제의 답은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다. 그 결과가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타임스퀘어의 거대한 전광판들일 것이다.
"가능한가?"의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확장가능한가?"의 문제만 남는다.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은, 언제나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 줄 것이다.
이 믿음이 내가 지난날 작성한 두 편의 논문과 몇 건의 프로젝트에서 가장 어렵고 답답한 순간에도 내가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10년간 컴퓨터에 매달린 끝에, 이제 막 첫 취업을 하고, 첫 논문을 쓰고, 소정의 임팩트를 만들어낸, 20대 후반의 공학인의 이야기다.
스스로 이뤄낸 것들이 그저 우연과 행운, 시기가 겹쳐 만들어진 요행이 아닐까 의심하고,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이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곳이 아닐까 의심하는 내가 있다.
만약, 내가 어디선가 이런 고민을 하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위에서 언급한 내 믿음 이야기를 들려주며 위로와 격려의 이야기를 건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면, 스스로를 설득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확장성 문제
2026년에 나는 많은 경험과 행복을 누리겠지만, 아마 2025년만큼의 새로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정상이고, 그래야만 한다.
논문을, 경험을, 임팩트를 쌓아가며, 더 이상 그것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나와 함께하는 것들이 되도록 만들자.
내가 만들어내는 영향력이 꾸준히, 충분히, 선하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올해부터 시작하는 나의 20대 후반은, 한여름밤의 꿈과 같았던 순간들이 내 일상이 되도록 만드는, 스케일링의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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